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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집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까?

버려진 아들이 다시 일어나 머릿돌이 되었다 | 마태복음 21:33-46

미국에는 빈집에 무단으로 들어가 사는 “스쿼터”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 한 사건이 화제였습니다. 어머니의 빈집을 스쿼터에게 빼앗긴 아들이, 자기 이름으로 임대계약서를 만들어 그 집에 당당히 들어가 “이제 내가 새 세입자다” 하며 버텼습니다. 결국 무단 점유자가 집을 나갔습니다. 세입자 행세를 하던 자가, 세입자에게 밀려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비슷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다만 결말은 훨씬 무겁습니다.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와 즙틀과 망대까지 다 갖춰서 농부들에게 맡기고 떠났습니다. 열매 거둘 때가 되자 종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그들을 때리고 죽였습니다. 더 많은 종을 보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내 아들은 존대하겠지” 하며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상속자다.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알고도, 계획적으로 반역했습니다. 원어를 보면 농부들이 아들을 ‘붙잡는’ 그 동작이, 앞서 종들을 붙잡던 것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상속자를 종과 다를 바 없이 취급하는, 극도의 멸시였습니다.

이것이 우리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시간, 재정, 자녀, 은사 앞에서 우리도 어느새 “내 것”이라 여기며 주인 행세를 할 때가 있습니다. 죄는 단지 나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당한 몫을 조금씩 거부해가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주인이 오면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은 자기 입으로 판결합니다.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할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자기 죄를 선고했던 다윗처럼, 그들도 자기 죄를 스스로 선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편을 인용하십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던져버린 돌이, 오히려 건물 전체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들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세우셨습니다. 사람은 죽였지만, 하나님은 다시 살리셨습니다. 사람들이 실패라 여겼던 십자가를, 하나님은 구원의 길로 사용하셨습니다. 이 돌 앞에서 우리의 반응은 결코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믿고 그 위에 서든지, 거부하고 그 앞에서 넘어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이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것은 구원이 취소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특권을 맡은 자로서 안일하게 머물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믿고 순종한다면, 그 삶에는 반드시 열매가 나타납니다. 사랑으로, 용서로, 정직으로, 섬김으로.

지도자들은 이 말씀이 자신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잡으려 했습니다. 가장 무서운 신앙은 모르는 신앙이 아니라, 알면서도 돌이키지 않는 신앙입니다.

이번 한 주, 세 가지를 기억합시다. 이미 예수님을 믿는다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주인 노릇을 하며 흘려듣고 있던 것을 다시 인정하기. 내 것이라 움켜쥐고 있던 시간·재정·자녀·은사 중 하나를 실제로 하나님께 내어드리기. 그리고 용서와 정직과 작은 섬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살아보기.

내 삶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세입자였는데 집주인 행세를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이려 했던 그 아들이, 오히려 우리를 위해 이 집의 새 주인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 순종은 자격을 증명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다시 맡아주신 그 은혜에서 흘러나오는 감사의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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