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1.08 칼럼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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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재고 계십니까? (마태복음 24:3–14)

첫째를 낳던 날, 병실에는 진통을 재는 모니터가 있었습니다. 그래프가 오르내릴 때마다 의사도, 간호사도, 남편인 저도 그 숫자를 들여다봤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이가 몇 시에 나올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늘 잽니다. 아침엔 체중계, 출근길엔 지하철 도착 시간, 점심엔 배달 앱, 저녁엔 아이 성적표와 주식 시세. 재지 않으면 불안하고, 재고 나서도 여전히 불안합니다.

종말 앞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종말을 너무 잽니다. 1992년 10월 28일, 휴거를 기다리며 직장과 재산을 정리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이는 종말은 재지 않고 세상만 잽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지 않을 것처럼, 그 이야기만 나오면 알람을 끄듯 꺼 버립니다.

감람산에서 제자들도 물었습니다. “언제입니까? 무슨 징조가 있습니까?” 방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으리라”는 말씀을 들은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첫마디는 날짜가 아니었습니다.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여기 “주의하라”는 원래 “보라”는 말입니다. 언제냐보다 먼저, 무엇을 보고 누구의 목소리를 따라가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세상과 교회에 닥칠 흔들림을 말씀하십니다. 전쟁과 난리 소문, 기근과 지진. 그리고 교회 안의 배신과 거짓 선지자. 그런데 그 어두운 목록의 끝에 놓인 것은 하늘의 무시무시한 징조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지막 때의 위기는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혼란 속에서 우리의 사랑이 식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의 징조는 하늘보다 식탁에서 먼저 나타납니다. 기도가 식고, 말투가 식고, 안부가 사라집니다.

솔직히 묻게 됩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는데, 이렇게 식어 가는 제가 끝까지 견딜 수 있을까요? 그런데 “구원을 얻으리라”는 원어로 “구원받을 것이다”입니다. 내가 붙잡고 버텨서가 아니라, 그분이 붙드시기에 끝까지 남는 것입니다. 아이가 손에 힘을 놓쳐도, 아빠가 그 손목을 쥐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롬 8:32) 여기 “내주신”은 마태복음 24장에서 성도를 “넘겨준다”던 바로 그 단어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넘겨주지만, 하나님은 먼저 우리 대신 아들을 십자가에 넘겨주셨습니다. 같은 단어가 세상에서는 배신이었고, 하나님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사랑은 식어도, 우리를 붙든 사랑은 식지 않습니다.

그러니 종말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늘을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일상을 떠나 어딘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사랑을 지키는 것입니다. 늦게 오는 가족을 위해 거실 불을 켜 두듯, 평범한 저녁 속에 기다림을 켜 두는 것입니다.

아직도 재고 계십니까? 그날은 우리가 잘 재서 오는 날이 아닙니다. 우리를 끝까지 붙드신 분이 우리를 데리러 오시는 날입니다. 끝은 아직 아닙니다. 그런데 괜찮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붙들려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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