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5-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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텀블러 속은 언제 씻으셨습니까?

마태복음 23:13–28

날이 추워지자 텀블러를 다시 꺼냈습니다. 겉은 닦으니 금세 반짝였습니다. 그런데 따뜻한 물을 담아 마시는데 냄새가 이상했습니다. 뚜껑을 열고 고무 패킹을 빼 보니, 거기에 오래된 때가 찌들어 있었습니다. 그동안 겉만 열심히 닦았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삶도 비슷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습니다. 회사에서도, 교회에서도 반짝이는 겉을 챙기느라 하루가 바쁩니다. 그런데 아무도 보지 않는 내 마음속은 얼마나 자주 들여다보고 있을까요?

마태복음 23장에는 그 시대에 가장 열심이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알았고, 율법을 지키려고 누구보다 애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화 있을진저”라는 무서운 말씀을 일곱 번이나 하십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 전체가 아니라, 자기 열심에 갇혀 버린 그 시대 지도자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서 제자들이 듣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그들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는다고 하십니다(13절). 놀랍게도 그들 자신도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천국을 가지고 오신 분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호산나를 외칠 때 화를 냈고, 예수님의 질문 앞에서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문은 그렇게 조금씩 닫혀 갔습니다.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닐 만큼 열심이었지만, 그 열심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문이 아니라 가로막는 벽이 되었습니다. 열심은 문이 되기도 하고, 벽이 되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그들의 저울이 기울어져 있었다고 보여 주십니다. 그들은 성전보다 성전의 금을 더 크게 여겼고, 부엌 창가의 박하 잎까지 세어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더 중한 것, 곧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습니다(23절). “더 중한 것”은 원래 “더 무거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삶으로 드러나는 바로 그것을, 그들은 가볍게 내려놓았습니다. 가벼운 것을 무겁게 들면, 무거운 것을 놓치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십일조를 버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작은 순종으로 큰 순종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잔을 보십니다. 겉은 깨끗한데,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다고 하십니다(25절). 속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득 차 있습니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린 자리에 빼앗음과 다스리지 못한 욕심, 위선과 “율법 없음”이 들어찼습니다. 버린 자리는 비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고 하십니다(26절). 그런데 이 말씀은 “눈 먼 바리새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겉은 닦을 수 있어도, 내 속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조차 잘 모릅니다. 결심만으로는 마음 깊은 곳까지 씻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소망이 없을까요? 며칠 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 잔은 25절에서 바리새인들이 겉만 닦던 그 “잔”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더 무거운 것을 버렸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잔,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의 잔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잔은 우리가 겉을 닦아서가 아니라, 그분이 받으신 잔 때문에 씻깁니다. 그 은혜는 우리를 그대로 두지 않고,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삶으로 조금씩 이끌어 갑니다.

이번 주, 텀블러에 따뜻한 차를 담을 때 세 가지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문, 저울, 그리고 텀블러. 나는 문일까, 벽일까? 나의 저울은 무엇을 무겁게 달고 있을까? 내 텀블러 속은 어떤가? 그리고 내 사랑이 작아 보일 때, 이것 하나를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텀블러 속을 씻기 전에, 주님이 먼저 우리를 위해 그 잔을 받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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