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는 개근인데, 사랑은 결석?
마태복음 22:34-40
아이들과 식탁 규칙을 하나 정했습니다. 제일 늦게 먹는 사람이 반찬통을 정리하고 빈 그릇을 설거지통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두어 달은 잘 지켜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오늘은 둘째가 할 차례야”, “내가 먼저 일어났으니까 내 차례 아니에요” 하는 말만 오갔습니다. 서로 돕고 배려하는 마음을 기르려고 만든 규칙인데, 아이들은 누가 먼저 일어났는지, 누가 안 치웠는지만 따지고 있었습니다. 규칙이 나빴던 것이 아닙니다. 규칙의 목적을 놓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도 그랬습니다. 어느덧 본질은 사라지고 지켜야 할 조항만 남았습니다. 바로 그런 눈으로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사두개인들이 입이 막혔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칼을 갈아 내보낸 질문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쓰인 것과 같은 ‘시험하다’라는 단어입니다. 당시 랍비들은 계명을 613개로 헤아리며 무거운 계명과 가벼운 계명을 논쟁했습니다. 어느 것을 골라도 나머지를 가볍게 여겼다는 비난을 받을 함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날 이후 아무도 감히 예수님께 묻지 못했습니다(마 22:46).
예수님은 신명기 6장 5절로 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유대인들이 문설주의 메주자와 이마의 테필린에 담아 날마다 암송하던 말씀이니, 흠잡을 데 없는 대답이었습니다. ‘온’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전체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이 시대가 말하는 사랑은 가슴이 콩닥거리는 감정이지만, 성경의 사랑은 다릅니다.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삼상 18:16)는 설렘이 아니라 신뢰와 충성을 뜻합니다. 신명기의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걷고, 경외하고, 말씀을 지키고, 섬기는 것입니다. 감정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이 끌리지 않는 날에도 이어지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묻지 않은 둘째 계명까지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레 19:18). 그리고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하십니다. 이웃 사랑도 첫째와 같은 무게입니다. 이웃은 편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시며 이웃의 경계를 넓히셨습니다. 이웃 사랑은 알바생 월급을 하루라도 미루지 않는 것, 사장님 앞에서와 아랫사람 앞에서 말투가 같은 것, 당사자가 듣지 못하는 단톡방에서 그 사람 욕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계명도 앞의 네 계명은 하나님 사랑을, 뒤의 여섯 계명은 이웃 사랑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은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십니다. 원어는 ‘매달려 있다’입니다. 못에 그림이 걸려 있듯 율법 전체가 이 두 계명에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오해를 조심해야 합니다. “계명은 필요 없고 사랑이 전부다”라고 하면 사랑이 무엇인지 내가 정하게 됩니다. “사랑은 필요 없고 계명이 전부다”라고 하면 남는 것은 계산과 정죄뿐입니다. 사랑은 계명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이고, 계명은 그 사랑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니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예배, 십일조, 성경 읽기, 기도, 봉사를 잘하면 “믿음이 좋다”고 말하지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드러납니다(요일 4:20). 이번 한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점검하기, 불편한 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기, 오늘 만나는 사람을 귀하게 대하기, 이 세 가지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을 이룰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하나님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이웃 사랑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걷지 못한 길을 예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걸으셨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이 우리 대신 두 계명을 이루셨고, 성령이 우리 마음에 그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에게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