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8.23 칼럼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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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완충인데, 방전입니다

부제 : 그분이 나 대신 방전되어, 내가 생명에 연결되었다 (마태복음 21:18-22)

핸드폰 배터리를 아침에 100%로 채워 나갔는데, 정작 필요한 순간에 전원이 켜지지 않은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화면엔 분명 완충이라고 떴는데, 실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겉으로는 다 채워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아무 힘이 없는 상태 — 이 이상한 불일치가 오늘 본문의 나무 한 그루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이른 아침,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걸어오시다 시장하셨습니다. 길가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보입니다. 잎사귀는 무성한데 열매가 없습니다. 무화과나무는 한 해에 열매를 두 번 맺는데, 겨울을 지나 이른 봄이면 묵은 가지에서 작은 첫 열매가 잎과 거의 동시에 달립니다. 그러니 잎이 무성하다는 건 그 작은 열매도 있어야 한다는 신호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예수님이 걸어오신 길목의 마을 이름이 벳바게, “첫 열매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열매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가가 보니, 그 기본적인 열매조차 없었습니다. 겉모습은 풍성했지만, 실체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나무에게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말씀하셨고, 나무는 곧 말랐습니다. 화풀이가 아닙니다. 구약에서 무화과나무는 늘 이스라엘을 가리켰습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실체가 없었던 것 — 어제 우리가 본 성전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놀라 묻자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문자 그대로 산이 움직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당대에 익숙했던 과장된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믿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다 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솔로몬의 성전 봉헌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야 합니다. 솔로몬은 엄청난 규모로 제사를 드린 뒤, 무릎 꿇고 아주 긴 기도를 드립니다. 백성이 언젠가 죄짓고 실패할 것을 미리 알고, 그때 돌아오는 길이 기도라고 못 박아둡니다. 이방인까지 이 성전에 초대합니다. 무화과나무가 맺지 못한 열매는 믿음과 회개와 순종, 그리고 특히 기도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란 무엇일까요. 하나는 성경이 이미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구하는 기도입니다. “사랑하게 하옵소서, 인내하게 하옵소서”와 같은 기도는 응답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경에 정확히 없는, 나의 구체적 소원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때는 겟세마네의 예수님이 본입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원하는 것을 구하되, 어떤 응답이든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 자격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십니다.

이 심판을 선언하신 예수님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십자가로 향하십니다. 그분은 나무처럼 속이 빈 분이 아니셨습니다. 완전한 순종을 이루신 분이 나무가 받은 그 선고 — 영원한 방전, 저주 — 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방전되어야 할 것은 우리였는데, 완충되신 분이 대신 방전되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연결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연결하셨습니다.

이 연결 자체는 단번에, 완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더 구원받는 것도, 못한다고 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삶을 보면, 분명 완충된 사람인데 실제로는 방전된 것처럼 메마르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신분은 완충인데 삶은 방전인 순간들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예배와 기도가 있습니다. 다시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있는 그 생명을 오늘도 실제로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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