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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내진 설계 (마태복음 21:1-11)

예전에 빌라에 살 때였습니다. 욕실에서 아이들을 씻기고 있는데 갑자기 4층인 집이 흔들렸습니다. 소리도 없이 컨베이어벨트 위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후다닥 1층으로 내려왔더니, 저처럼 놀라 나온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포항 지진이었습니다.

지진을 겪은 사람들은 그다음부터 건물을 다르게 짓습니다. 흔들려도 버틸 수 있게, 내진 설계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흔들림이 왔을 때 버틸 수 있게 설계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흔들릴 때마다 무너집니까.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 코앞, 감람산에 이르렀습니다. 이 산은 그냥 지나가는 지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 머물렀던 곳이며(겔 11:23), 스가랴는 메시아가 바로 이 산에 서실 것이라 예언했습니다(슥 14:4). 유대인들에게 감람산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산이었습니다.

성문까지 얼마 남지 않은 그 지점에서, 예수님은 나귀를 구해오라 명하십니다. 240km가 넘는 길을 걸어오시고도 정작 마지막 몇 걸음에서 나귀를 타신 겁니다. 몸이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가면 나귀가 있을 것이다. 누가 물으면 이렇게 말하라.” 이 명령은 미리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날의 분위기에 휩쓸린 일이 아니라,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걸음이었습니다.

마태는 이 장면을 스가랴 9장 9절의 성취로 설명합니다.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탔도다.” 그런데 이 “나귀 탄 왕”이라는 그림은 스가랴가 처음 그린 게 아닙니다.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야곱이 유다에게 준 축복 속에 이미 나귀와 왕권이 함께 묶여 있었습니다. 오늘 나귀를 타신 이 왕은 오늘 갑자기 등장한 왕이 아니라, 몇 백 년, 몇 천 년 전부터 이미 예비된 왕입니다.

무리는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그들이 기대한 다윗은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로마를 무너뜨릴 정복자였습니다. 그러나 스가랴가 떠올린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한 뒤 나귀를 타고 조용히 돌아온 다윗이었습니다. 같은 이름 아래 완전히 다른 두 그림이 겹쳐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로마를 무너뜨리길 원했지만, 하나님은 죄를 무너뜨리길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문을 지나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했습니다. “소동하여”는 원어로 세이오(σείω),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훗날 십자가에서 땅이 진동할 때(27:51), 부활의 아침 경비병들이 떨 때(28:4) 다시 나옵니다. 오늘의 소동은 앞으로 겪을 더 큰 흔들림의 예고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모든 소동의 한복판에 계신 그분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인기가 최고조였을 때도, 며칠 뒤 그 목소리가 “십자가에 못박으라”로 바뀌었을 때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상의 사울 왕은 백성의 목소리에 흔들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지만, 예수님은 백성의 목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대로 행하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성격이 아니라, 스스로 택한 낮아짐입니다. 그 낮아짐은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예비된 자리 위에 서 있었습니다.

여러분, 저도 최근에 많이 흔들렸습니다.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었고, 그 흔들림이 저를 부족한 목사로 규정하게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나를 어떻게 보실까.”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를 위해 죽으셨고, 지금도 저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가정의 문제가 여러분이 아닙니다. 재정의 문제, 건강의 문제도 여러분의 정체성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날도 흔들리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걸어가셨습니다. 결국 십자가에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사랑은 오늘 내 상황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영적인 내진 설계입니다. 내가 스스로 단단해져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미 놓아두신 그 기초 위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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