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마태복음 20:1~16)
컨설턴트 회사에 다니던 시절, 대표가 저를 불러 물었습니다. “현철씨, 성경에서 예수님이 포도원 품꾼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봤어. 그런데 하나님은 경영 감각이 부족하신 것 같아. 어떻게 일찍 와서 일한 사람과 마지막에 와서 일한 사람에게 똑같은 돈을 줄 수 있지?” 저는 그건 경영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의 이야기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다시 읽으며 깨달았습니다. 그 질문은 믿지 않는 사람만의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비유 속에서 하루 종일 일한 품꾼들이 똑같이 물었고, 솔직히 우리 안에도 그 질문이 있습니다.
이 비유의 무대는 지금도 있습니다. 새벽 인력시장입니다. 어둠 속에 사람들이 모여 서고, 호명되면 안도의 한숨이, 비껴가면 얼굴에 그늘이 집니다. 건설 현장에서 일했던 어느 작가는 그곳에서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은 “오늘 하루의 쓸모를 타인에게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뜻”이라고 썼습니다. 2천 년 전 유대 땅의 새벽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새벽에, 품꾼이 주인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주인이 먼저 시장으로 나왔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한 가족의 하루 생계비입니다. 그 새벽의 고용이 없었다면 그 집은 오늘 저녁을 굶습니다. 고용된 것 자체가 은혜였습니다.
주인은 오전 9시에도, 정오에도, 오후 3시에도, 심지어 오후 5시에도 나갑니다. 일할 시간이 한 시간 남은 때에 사람을 쓰는 것은 경영이 아니라 긍휼입니다.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아무도 써주지 않아서, 쓸모를 증명할 기회조차 없이 열두 시간을 서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임금 약속조차 없었습니다. 주인의 선하심 외에는 붙잡을 것이 없었습니다.
날이 저물고 품삯을 줄 때, 주인은 일부러 나중 온 자부터 줍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본 순간, 새벽 품꾼들의 마음이 무너집니다.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생각해 보십시오. 종일 뙤약볕에서 일하는 동안 그들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저녁에 식구들과 둘러앉을 밥상 하나를 바라보며 하루를 견뎠습니다. 원망은 더위 속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옆 사람의 데나리온을 본 순간, 비교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의 항의는 전부 사실이었습니다. 저들이 한 시간만 일한 것도, 우리가 종일 수고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전부 틀렸습니다. 계산서에서 딱 한 줄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주인님이 그 새벽에 우리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은혜를 빼고 계산하면 인생은 반드시 손해로 계산됩니다. 은혜가 빠진 자리에는 비교만 남는데, 비교에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를 듣던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무엇을 얻으리이까.” 처음 부름받던 날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엎드렸던 그가, 3년 만에 자기가 버린 것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열심히 섬기는데 열매가 안 보일 때, 성실하게 사는데 몸과 직장이 흔들릴 때, 말씀대로 사는데 관계가 틀어질 때 — 원망은 힘든 순간이 아니라 비교하는 순간 태어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본문은 우리의 수고를 반박하지 않습니다. 수고도 눈물도 진짜이며, 하나님은 그것을 잊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수고를 세는 동안 은혜를 세지 않게 된 것입니다.
주인은 품꾼의 계산을 고쳐주는 대신 질문을 되돌립니다. “내가 선하므로 네 눈이 악하게 보느냐.” 성경에서 악한 눈은 단순히 시기하는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불편해하는 눈입니다. 그리고 19장 30절에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라던 문장이, 비유를 지나 20장 16절에서는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로 뒤집혀 나옵니다. 문장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누구인지 안 사람에게는 같은 말씀이 경고가 아니라 복음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은 곧장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십자가를 향해서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그 품삯을 대신 치러야 했고, 하나님의 선하심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후 우리에게 흘러온 은혜입니다. 우리의 계산은 십자가에서 이미 끝났습니다.
이번 한 주, 이 질문 하나를 붙잡으십시오. “나는 수고를 세고 있는가, 은혜를 세고 있는가?”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비교하지 않습니다. 비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