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받은 사람은 순서를 잊고 — 주님을 따릅니다."
부부 사이만큼 계산서가 쌓이기 쉬운 관계도 없습니다. 설거지 횟수, 참아준 날들, 양보한 것들. 그 계산이 맞지 않을 때 서운함이 되고, 서운함이 쌓이면 원망이 됩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렸는데요 — 그럼 뭘 받습니까?"
그런데 우리 부부의 가장 큰 계산서는 이미 지불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서로에게 받아낼 것을 세기 전에, 함께 받은 것을 먼저 기억하는 부부가 되게 하십시오.
혼자 예배드리고, 혼자 기도하는 세월이 쌓이면 이런 마음이 올라옵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배우자는 안 변합니까?" 헌신이 어느새 청구서가 되어 있는 겁니다. 버림조차 실적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 인내조차 계산서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신앙의 수고는 배우자의 변화를 받아내기 위한 지불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 순서가 바로 설 때, 지치지 않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거 하면 사줄게." "말 잘 들으면 놀아줄게." 훈육에 필요한 말들이지만, 그것만 쌓이면 아이는 사랑을 거래로 배웁니다. 잘해야 받고, 못하면 못 받는 것으로. 그렇게 자란 마음은 어른이 되어 하나님 앞에서도 계산기를 듭니다.
이번 주, 아무 조건 없이 주는 시간을 만들어 보십시오. 아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안아주고, 이유 없이 맛있는 것을 사주며 말해 주십시오. "그냥. 네가 내 아이라서." 그것이 아이가 은혜를 배우는 첫 수업입니다.
사춘기 자녀가 문을 닫고 들어가면, 부모 마음에 계산서가 올라옵니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학원비, 새벽 도시락, 포기한 것들. 다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계산서를 내미는 순간, 사랑은 채권이 되고 자녀는 채무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받아낼 것 없이 주는 사랑 — 그것이 닫힌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하나님, 아무리 봐도 저 친구보다 제가 더 믿음으로 사는 것 같은데 — 왜 저 친구는 결혼하고 저는 혼자입니까?" 목사님도 청년 시절 그렇게 기도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신실함을 근거로 응답을 청구하는 기도,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품삯을 계산하는 고용주가 아니라 아버지이십니다.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이 내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응답이 더딘 것이 하나님이 계산을 잊으셔서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