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6.28 칼럼 이미지
2026.6.28 칼럼 이미지

제목 : 억울한데 충분합니다

예전에 교회 행사 준비를 하다가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한 목사님이 시킨 일을 열심히 했는데, 담임 목사님 앞에서 왜 그랬냐는 핀잔을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손을 들어줄 줄 알았는데 — 조용하셨습니다. 아주 평화롭게.
억울했지만 그냥 넘어갔습니다. 오늘 본문의 므비보셋이 딱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다윗이 먼저 찾아가 “두려워하지 말라”며 왕의 식탁에 앉혀준 사람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갈 때, 그는 왕이 없는 자리에서도 발을 씻지 않고 수염을 다듬지 않았습니다. 몸 전체가 충성의 증거였습니다. 그의 종 시바가 거짓말로 므비보셋의 재산을 가로챘는데, 므비보셋은 왕 앞에서 진실을 말했습니다. 억울함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너와 시바가 밭을 나누라.” 거짓말한 시바와 충성한 므비보셋이 똑같이 반반. 충분한 사실 확인 없이 서둘러 내린 판결이었고, 결과적으로 공의롭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은 비슷한 상황에서 진짜 어머니의 반응을 보고 판결을 철회했지만, 다윗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제 므비보셋이 따져야 할 순간입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의 대답이 나옵니다. “내 주 왕께서 베샬롬(בְּשָׁלוֹם, 평안히) 돌아오셨으니 — 그가 다 가지게 하소서.”
억울한데 — 만족합니다. 땅을 빼앗겼는데 — 충분합니다. 왜입니까? 왕이 돌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므비보셋이 받은 것은 정의가 아니었습니다. 왕이었습니다.

본문에는 또 두 장면이 있습니다. 바르실래는 다윗과 함께 요단강을 건넜지만 예루살렘까지는 가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가장 필요로 했던 사람을 붙잡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유다는 왕이 돌아왔는데 — 다윗에 대한 자신들의 “열 야드(יָד, 지분)”를 따지며 싸웠습니다. 왕을 관계가 아니라 소유물로 환산했습니다. 다윗은 침묵했습니다. 중재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같은 강을 건넌 사람들이 — 누구는 왕을 봤고, 누구는 지분을 봤습니다.
다윗은 세 자리에서 무너졌습니다. 므비보셋 앞에서 공정한 재판장의 자리, 바르실래 앞에서 진정한 화해자의 자리, 이스라엘과 유다 앞에서 피스메이커의 자리. 다윗보다 더 큰 왕이 필요합니다.
그 왕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정의와 완전한 은혜를 십자가에서 동시에 이루셨습니다(롬 3:26).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경계를 직접 건너오셨습니다(엡 2:14). 지금도 살아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히 7:25).

므비보셋이 왕의 귀환으로 만족했다는 것은 현실 문제를 포기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정당한 방법으로 진실을 말했습니다. 다만 마지막 판결을 자기 손으로 만들려 하지 않았습니다. 문제 해결을 포기한 게 아니라 — 문제 해결자를 신뢰했던 겁니다.
사무엘하 전체가 하나의 질문을 합니다. “이 왕으로 충분한가?” 다윗은 서지 못한 자리들이 있었습니다. 그 균열들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더 큰 왕이 필요하다고. 그 왕이 오셨습니다.
다윗이 서지 못한 그 자리에 — 예수님이 서셨습니다. 그래서 억울해도 충분합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