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내 이야기가 내가 없다
목사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강현철 목사의 네팔 단기선교’라는 이름으로 처음 해외 선교를 떠났습니다. 이름은 제 이름이었고 팀장도 저였습니다. 그런데 경험이 없었습니다. 태국 경유 중 환전 실수가 생겼고, 네팔에서도 팀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성숙한 권사님, 집사님들이 알아서 사역을 하셨고 모든 일정은 잘 마무리됐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내 선교였나?’ 이름은 제 이름이었는데 — 내 손을 떠난 선교였습니다.
혹시 이런 적 있으십니까? 내가 주인공이어야 하는데 내가 없는 것 같은 순간.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멋지게 등장해서 문제도 해결하고 잘 됩니다. 그런데 나의 현실이라는 드라마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풍성한광염교회라는 드라마도 3년째 방영 중이지만 — 아직 교회가 크게 건축되고 수많은 성도가 모이는 장면은 없습니다. 솔직히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는 아닙니다. 오늘 사무엘하 17장 본문이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다윗의 이야기인데 — 다윗이 없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궁을 떠난 다윗은 지금 광야에서 도망 중입니다. 그 자리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히도벨과 후새입니다. 아히도벨은 이스라엘 최고의 지략가입니다. 밧세바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감정이 아닌 계산으로 압살롬 편에 섰습니다. 그의 계략은 빠르고 완벽했습니다. 압살롬과 장로들이 만장일치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성경은 그 계략을 토브 — 기능적으로 완벽하다고 기록합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원합니다. 스펙 좋고, 전략 좋고, 계산 빠른 사람. 솔직히 저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압살롬이 갑자기 후새를 부릅니다. 후새는 다윗이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자원한 게 아니라 —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후새의 반론은 아히도벨보다 논리적으로 허술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넘어갔습니다. 왜일까요? 14절이 답합니다.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그들은 자기가 판단한다고 생각했겠지만 — 하나님이 이미 거기 계셨습니다.
돌아보면 흔적이 있습니다. 압살롬이 후새를 부른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냥 불렀습니다. 후새의 논리가 허술했는데 압살롬이 넘어갔습니다. 정보 전달 경로가 너무 얇았는데 뚫리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이미 거기서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다윗이 몰랐을 뿐입니다.
완벽한 계략이 무너지자 아히도벨은 스스로 목을 맸습니다. 신약에서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유다도 계산했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 “얼마나 주려느냐”고 물었습니다. 은 30 — 노예 한 명의 값으로 예수님을 거래했습니다. 아히도벨도, 유다도 같은 언어를 썼습니다. “얼마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몸무게부터 시작해서 키, 성적, 연봉, 평수까지 — 우리는 숫자로 판단받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하나님 없는 토브는 결국 자신을 향합니다.
그런데 계산하지 않으신 분이 한 분 계십니다. 빌립보서 2장은 말합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하나님은 멀리서 응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직접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강 목사를 위해 십자가에 죽는 것이 나에게 이익인가?’라고 계산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내가 없는 그 자리에 — 계산 없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지금 내 드라마가 지루하고 힘든 장면이 계속되고 있습니까? 다윗이 도망가는 동안 하나님은 이미 하고 계셨습니다. 풍성한광염교회 드라마도, 여러분의 드라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이야기에 내가 없는 것 같은 그 자리가 — 사실은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