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때 일입니다. 제가 일하던 곳에서 홈페이지를 만들게 되었고 그 일을 제가 맡았습니다. 관련 업체와 회의를 거듭했고 계약 직전까지 왔습니다. 그때 홈페이지를 거의 몰랐던 행정 담당 친구가 말했습니다. “이거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처음엔 흘려들었습니다. 내가 전문가인데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친구 말대로 다시 들여다보니 — 큰 손해를 볼 뻔한 계약이었습니다. 가장 많이 알던 제가 못 봤고, 잘 몰랐던 친구가 봤습니다.
아는 것이 많다고 반드시 잘 보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많이 알수록 오히려 더 못 볼 때가 있습니다.
사무엘하 16장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압살롬과 아히도벨입니다. 둘 다 탁월했습니다. 그런데 망했습니다. 왜일까요?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본문 23절은 놀라운 사실을 말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아히도벨의 조언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여겼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가 최고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면서도 — 따르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에는 두 가지 핵심이 있습니다. 하나는 토브입니다. 창세기 1장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그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설계하신 질서와 목적이 온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헤세드입니다. 언약에 기초한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도 끝까지 책임을 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참된 지혜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설계하신 질서 안에, 그분이 맺으신 언약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그 지혜를 알았지만 왕권을 향한 욕심이 눈을 가렸습니다. 다윗처럼 기다리며 하나님을 따르는 삶이 너무 답답하고 느려 보였습니다. 아히도벨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여겨질 만큼 탁월했지만 그 지혜가 향한 곳은 복수와 욕심이었습니다. 둘 다 무너졌습니다.
반면 후새는 달랐습니다. 적진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목숨이 위험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어리석어 보이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언약 왕조를 지키기 위해 그 자리에 섰습니다. 때로 진짜 지혜는 지혜롭지 못해 보이는 자리에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도 그 자리에 서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내려오는 것이 세상의 눈에는 지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미련하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모두 압살롬에 더 가깝습니다. 욕심이 눈을 가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스스로 따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칼빈은 이것을 이중 은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는 칭의,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길을 따르게 하시는 성화입니다. 우리가 후새처럼 살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의지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참된 지혜는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성공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적으로 믿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예수님이 그 기준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가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자리였지만 — 그것이 하나님의 진짜 지혜였습니다. 그 은혜 안에서 우리도 비로소 진짜 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