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17-칼럼
20260517-칼럼

해외 선교를 떠났을 때 출발부터 준비물을 한국에 놓고 오는 실수가 생겼습니다. 현지에서도 문제가 계속 생겼습니다. 그런데 전체를 인도하는 전도사님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선교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왕궁을 버리고 도망가던 다윗에게 시므이가 나타나 돌을 던지며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다윗 곁의 아비새가 말했습니다. “제가 저 놈의 머리를 베겠습니다.” 당연한 반응입니다. 우리라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놔두어라.” 왜였을까요?

시므이의 저주는 단순한 욕설이 아니었습니다. 몸으로 흙먼지를 날렸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의 저주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말로는 “살인마야, 사악한 자야”라고 외쳤습니다. 창세기 3장의 저주 전체가 다윗에게 날아온 겁니다.

왜 다윗은 시므이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을 목동에서 쉽게 왕이 된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골리앗 이후 다윗은 10년 넘게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도망 다녔습니다. 왕이 된 이후에도 전쟁과 죄와 가정의 비극이 이어졌습니다. 그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둘째, 시므이의 말이 완전히 틀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선포했습니다. “칼이 네 집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리라.” 압살롬의 반역은 다윗 자신의 죄가 뿌린 씨앗이었습니다. 완전히 틀린 말은 무시할 수 있습니다. 반은 맞는 말 — 그것이 더 아픕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다윗은 아담과 달리 하나님을 피하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다윗의 “혹시”는 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내 계획 안에 가두지 않겠다는 겸손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 바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입니다. 지독한 겸손과 지독한 신뢰가 결합된 역설적 확신입니다.

비슷한 길을 걸은 사람이 또 있습니다. 히스기야입니다. 앗수르의 랍사게가 온 백성 앞에서 저주를 쏟아낼 때 히스기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성전으로 올라가 그 저주를 하나님 앞에 펼쳤습니다. 다윗은 자기 죄 때문에, 히스기야는 타협의 결과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릅니다. 아무 죄가 없으셨습니다. 오직 우리 죄 때문에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갈 3:13). 창세기 3장의 저주가 십자가에서 끝났습니다.

우리에게도 저주 같은 일이 옵니다. 우리 죄 때문에 오는 것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오는 것도 있습니다. 그때 해야 할 일은 하나입니다. 그 저주 속에서 은혜를 발견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놔두어라, 혹시 하나님이 선으로 갚아주실지”라고 고백하십시오. 히스기야처럼 그 저주를 하나님 앞에 펼치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 그 저주를 이미 다 받으셨습니다.

저주 속에 핀 꽃 —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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