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기를 깬 발걸음, 온 세상으로 향하다
우리는 흔히 익숙한 곳에 머무는 것을 편안하게 여깁니다. 기독교인에게 주일에 교회에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상이지만, 이슬람 사원이나 힌두교 사원에 가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처럼, 우리의 일상은 경계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 지역은 단순한 ‘다른 장소’를 넘어 종교적, 사회적 ‘금기’의 영역이었습니다. 이방인과 어울리는 것은 동족에게 비난받을 일이었고, 유대인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지난주 본문에 이어, 예수님은 이방인의 대표적 도시인 두로와 시돈을 넘어 더 깊은 이방 지역인 데가볼리(Decapolis, 열 개의 도시) 지방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데가볼리는 알렉산더 대왕 시대부터 헬라 문화와 경제를 확장하며 유대인을 압박하기 위해 세워진 도시들의 연합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가장 유대적이지 않은, 가장 헬라적인 땅, 로마에 협력하는 이방인의 땅으로 가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평생 유대 땅만을 밟으시고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셨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경계를 넘는 발걸음’ 자체가 이미 그분의 사역이 유대인의 구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향하고 있음을 선포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2. 두 기적의 대조: 유대인의 바구니와 이방인의 광주리
예수님은 이방인의 땅에서도 유대 땅에서 하셨던 것과 똑같은 일을 행하셨습니다. 산에 올라가 가르치시고, 몰려든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이방인들까지도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고 고백했습니다(마 15:31).
이어지는 사건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과 놀랍도록 유사한 칠병이어의 기적입니다.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남자만 4,000명을 먹이신 이 사건은 단순히 두 번 일어난 동일한 기적이 아닙니다. 마태가 이 두 사건을 반복적으로 기록한 데는 분명한 신학적 목적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남은 음식을 담은 ‘바구니’의 차이에서도 드러납니다.
오병이어 기적 후 남은 음식을 담은 바구니는 유대인들이 정결한 음식을 담고 다니던 작은 바구니(코피노스, κoϕiνoς)였습니다. 이는 유대인을 위한 기적을 상징합니다.
반면, 칠병이어 기적 후 남은 음식을 담은 바구니는 이방 지역에서 널리 쓰이던 음식 저장용 큰 광주리(스퓌리스, σπυρiδα)였습니다. 이는 이방인 지역에서 베푸신 기적을 명확히 구분하는 상징입니다.
칠병이어의 기적은 유대인을 향한 구원이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확장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의 사역, 곧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며,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갇힌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은혜(사 61:1-3)는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구원자일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이처럼 경계 없는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동일하게 베푸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3. 내 마음의 왕좌는 누구의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의 구원자라는 선언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절실한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상을 기억해 봅시다.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결과는 도덕적, 성적 타락, 그리고 동족을 향한 살인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 사회와 세계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평화 지수는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전쟁과 테러, 그리고 ‘경제적인 살인’이라 불리는 대기업이나 권력자의 이익 추구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 모든 악한 일은 결국 사람이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을 왕으로 삼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 행하셨던 기적을 이방인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행하신 두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왕으로 모셔야만 이 타락과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은 단순히 내세의 천국 티켓을 확보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나의 일상, 즉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인내하고, 친절을 베풀고, 참는 삶의 태도를 말씀에 순종하여 올바로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4. 나는 여전히 예수님을 믿는가? (네게 있는 빵이 몇 개냐)
칠병이어 기적을 앞둔 제자들의 대답은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여기는 빈 들인데, 이 많은 무리를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무슨 수로 구하겠습니까?”(마 15:33)
이들은 불과 얼마 전, 빵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비슷한 상황이 오자 그들은 또다시 절망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거 내 삶에 행하신 기적과 은혜를 분명히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내 앞에 마음을 짓누르는 고난과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삶의 문제(질병, 관계의 어려움, 경제적 난관 등)가 닥치면, 제자들처럼 ‘무슨 수로…’라며 좌절합니다.
목회자 역시 성도들의 힘든 상황 앞에서 무력감을 느낍니다. 성도들의 힘든 마음을 치유할 ‘능력’도, 상황을 호전시킬 ‘무엇’도 없는 것 같을 때, 예수님은 똑같이 물으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제자들은 미약하게나마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엄청난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이 가진 미약한 것을 축사하시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빵과 물고기’는 무엇입니까? 주일과 주중에 말씀을 묵상하고 전하는 것, 성도를 위해 기도하는 것, 사정을 듣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등 우리가 가진 것은 미약하고 부족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주님은 우리의 그 부족함과 미약함을 통해서도 놀랍게 역사하십니다.
5. 결론: 나의 미약함을 주님께 드릴 때
이번 한 주간, 우리에게는 두 가지 적용의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첫째, 내 삶을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불안함, 떨리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을 진정시켜 달라고 솔직하게 기도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빵이 무엇인지 찾아서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내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것을 전부 쏟아부어도 부족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지만, 주님께 드릴 수 있는 나의 작은 순종, 나의 시간, 나의 마음을 찾아서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미약한 것을 드리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실지, 꼬였던 관계와 막혔던 상황을 어떻게 인도하실지 기대하며 나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온 세상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모실 때, 우리의 부족함 속에서 놀라운 은혜가 경험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