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누가 최고인가? 무엇이 최고인가?
본문: 사무엘하 1:17-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무엘하 1장에서 이스라엘 역사에 기록된 한 편의 슬픈 노래, ‘활 노래’를 마주합니다. 이 노래는 누가 불렀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될 다윗입니다. 다윗은 누구를 위해 이 노래를 불렀습니까?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과, 그의 아들이자 다윗의 둘도 없는 친구였던 요나단을 위해서입니다.
길보아 산 전투에서 사울과 요나단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의 반응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자신을 평생 괴롭혔던 사울이 죽었으니 기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다윗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울과 요나단, 두 사람의 죽음 앞에서 진심으로 애통하며 슬픔의 노래를 짓고, 심지어 이 노래를 유다 자손에게 가르쳐 길이 기억하게 했습니다.
다윗은 이 노래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단순히 두 사람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들보다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은근히 드러내려는 걸까요? 오늘 이 ‘활 노래’를 통해 진정 누가, 무엇이 가장 위대한지를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1. 비통함으로 찢어진 마음: 애가의 절규
사무엘하 1장의 애가는 충격과 슬픔으로 시작됩니다. 다윗은 두 용사의 비참한 죽음 앞에서 가슴을 찢습니다. 이 소식을 블레셋의 주요 도시인 가드와 아스글론에 알리지 말라고 절규합니다 (20절). 왜입니까? 이 소식은 이스라엘에게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슬픔과 치욕이지만, 원수 블레셋에게는 더 없는 기쁨과 승리의 축제 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미 소식이 전해졌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절규는 그만큼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다윗의 비통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제발 그들이 몰랐기를… 제발 기뻐하지 않았기를…’ 처절한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이 슬픔은 죽음의 장소인 길보아 산에 대한 저주로 이어집니다 (21절). 사울과 요나단의 피가 흘렀기에, 하늘에서는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않고 땅의 생명력조차 말라버리기를 원합니다. 이는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자신의 영웅들을 잃은 깊은 상실감과 비탄이 자연 만물에까지 투영된 표현입니다. 비극적인 죽음 앞에서 느끼는 다윗의 깊은 고통과 절망이 절절하게 드러납니다.
2. 땅의 영광을 노래함: 용사들을 높이다
이렇게 슬픔과 저주를 쏟아내던 다윗은 이제 사울과 요나단을 칭송하며 높입니다 (22-24절). 그는 두 사람의 뛰어난 무예를 기억합니다. 요나단의 주요 무기는 ‘활’이었습니다 (22절). 그가 활을 당기면 화살은 결코 빗나가는 법이 없었습니다. 사울의 주요 무기는 ‘칼’이었습니다 (22절). 그가 칼을 휘두르면 허공을 치는 법 없이 늘 적을 쓰러뜨렸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힘이 센 용사'(23절)라고 노래합니다. 또한 비록 관계가 복잡했지만, 생전에 서로 사랑하고 화목했으며 (23절),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였음을 강조합니다.
특별히 사울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여인들에게 그를 위해 울라고 촉구하며, 그가 왕으로서 백성들에게 베풀었던 번영을 상기시킵니다. 그가 백성들에게 화려한 옷과 금 장신구를 입혔던 사실을 기억하고 애도하라는 것입니다 (24절).
여기서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땅에서의 위대함, 인간적인 능력과 영광을 최대로 칭송합니다. 그들의 뛰어난 무기 사용 능력, 용맹함, 관계, 그리고 사울 왕으로서 백성에게 베풀었던 것들을 강조하며, 그 상실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큰 손실인지를 보여줍니다.
3. 요나단에게 향한 마음과 ‘활’의 이중 의미
이 애가는 독특하게 사울과 요나단 모두를 노래하다가 마지막에는 요나단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25-26절). 특히 26절은 다윗의 지극히 개인적인 애통함이 폭발하는 부분입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26절). 이 구절 때문에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오해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근동 문화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개인적인 애정뿐만 아니라 국가 간 조약이나 사람 사이의 굳건한 충성심과 언약적 관계를 표현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사울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다윗을 지지하고 목숨을 다해 도왔던 요나단의 깊은 충성심과 언약적 관계를 다윗이 가장 강력한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애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바로 ‘활 노래’입니다 (18절). 그리고 ‘활’은 요나단을 상징하는 주요 무기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어 원어인 קֶשֶׁת (qeshet)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קֶשֶׁת은 문자적으로 ‘활’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언약의 표징인 ‘무지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애가는 요나단의 ‘활'(קֶשֶׁת)을 통해 인간적인 능력과 그 비극적인 끝을 노래합니다. 요나단은 최고의 활잡이였지만, 결국 활을 꺾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단어인 קֶשֶׁת은 노아 홍수 후 하나님께서 다시는 땅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언약을 세우시고 그 증거로 보여주신 ‘무지개’를 가리킵니다 (창세기 9:13). 인간의 죄악이 가득하여 심판(홍수)이 임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신실하심으로 언약을 기억하고 무지개를 통해 약속을 보증하셨습니다.
4. 활과 무지개, 그리고 구속사의 정점: 예수 그리스도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구속사적 관점을 얻습니다. 요나단의 ‘활'(קֶשֶׁת)은 인간의 힘과 언약의 한계, 그리고 그로 인한 죽음을 상징합니다. 반면, ‘무지개'(קֶשֶׁת)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언약적 신실하심과 그로 인한 생명을 상징합니다.
사울 왕조는 인간의 불순종과 한계로 실패하고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습니다. 요나단은 그 왕조에 속한 최고의 용사였지만, 그의 활(인간의 힘)은 그 자신과 왕조의 몰락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비극 속에서도 그의 언약을 폐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지개 언약처럼, 하나님께서는 심판과 파괴 속에서도 그의 약속을 기억하시며 새로운 시작을 여셨습니다. 바로 다윗을 통해 메시아 왕국의 언약을 이어가신 것입니다. 다윗 왕조는 인간의 능력(활)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무지개 언약)을 통해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언약의 정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나단의 활(קֶשֶׁת)이 인간의 유한한 힘을 상징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죄와 사망, 사탄의 권세를 완전히 정복하시는 궁극적인 קֶשֶׁת, 즉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모든 언약을 성취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과 승리를 확증하셨습니다. 무지개가 단지 땅의 파괴로부터의 구원을 약속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새 언약을 통해 죄와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결국 ‘활 노래’는 단순히 두 영웅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요나단의 ‘활'(인간의 힘)의 한계와 그 비극적인 결과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무지개'(언약)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이 언약의 약속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가리킵니다.
5. 누가, 무엇이 가장 위대한가?
이 애가의 핵심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용사’라 칭하며 그들의 무예와 용맹함을 극찬합니다. 활과 칼 사용에 한 치의 오차도 없었고,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힘이 셌다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이 찬양의 절정에서 다윗은 반복적으로 외칩니다. “어찌하여 용사들이 쓰러졌는가!” (19, 25, 27절).
다윗은 여기서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사울과 요나단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용맹했으며, 심지어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최고로 생각하고 의지해야 할 분은 누구입니까? 누가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죽음조차 이기며, 영원토록 변치 않는 분이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다윗을 최고의 왕으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조차도 죄와 죽음 앞에서 무력한 인간 왕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 왕의 한계를 보며 진정한 구원자, 메시아를 기다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질문은 결국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최고의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그분은 이 땅에서 태어난 어떤 왕이나 영웅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왕이시며,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시며,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시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만물의 진정한 주인이신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 최고는 누구이십니까? 세상이 최고라고 말하는 돈, 명예, 권력, 쾌락, 건강, 지식… 이 모든 것은 요나단의 활처럼 언젠가 꺾이고 사라질 땅의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쌓아둔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의미 없어질 수 있습니다 (눅 12:20).
성경은 이 땅의 것들이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몸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기에 의식주가 필요하고, 관계 속에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하나님의 솜씨에 감탄하고, 사랑하는 이들과 맛있는 것을 먹으며 웃는 시간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소망해야 할 가장 최고의 것은 영생,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시선은 항상 하늘 보좌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고정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활 노래’를 통해, 비극 속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보며, 인간의 한계와 땅의 영광의 덧없음을 깨닫고, 오직 참된 위대함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한 생명만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소망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