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2.16 칼럼
사진: Unsplash의Guilherme Stecanella

자신을 도망자로 생각한 다윗은 사울을 피해 가드로 망명을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셨습니다. 자신이 도망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다윗은 망명 신청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돌아온 곳은 아둘람 굴입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러자 그의 가족과 환난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윗에게로 모였습니다. 다윗은 무려 400명가량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 혹은 여유 있는 사람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잘 웃는 사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 무언가 받을 것이 있는 사람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기본적인 마음이죠.

지금 다윗 옆에 어떤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힘든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다윗에게 힘을 주기보다는 ’그 반대의 경우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가드로 망명 신청했을 때의 다윗이라면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가지 않고 바로 왕이 되었다면 그는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왜 하나님이 자신을 아둘람 굴에 보내셨는지, 왜 자신을 이렇게 힘든 사람의 우두머리로 만드셨는지 그것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어떤 정치를 해야 하는지 아둘람 굴의 경험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둘람 굴을 떠나 요새로 갔습니다. 그때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와서 “유다 땅으로 가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에 대한 소문이 사울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사울은 신하들을 불렀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이새의 아들이라고 무시하면서 신하들에게 말합니다.

“내 아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너희는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내 아들인 신하 한 명을 통해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나에게 알려준 사람이 없다.”

그러자 도엑이 “제가 이새의 아들과 아히멜렉이 만나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또 도엑은 “제가 이새의 아들과 아히멜렉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압니다”라며 사울에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또 도엑의 말도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저번 주에 다윗이 거짓말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다윗의 거짓말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죠. 그에 비해서 사울과 도엑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합니다. 자신의 잘못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울 왕은 놉 지방에 있는 제사장들을 불렀습니다. 그들 중 아히멜렉에게 “왜 다윗을 도와주었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사울은 아히멜렉을 죽이기 위해서 거짓 정보로 그에게 누명을 씌우고 있습니다. 아히멜렉은 사울 왕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합니다. 그러나 결국 사울은 도엑을 통해서 놉 지방의 제사장만 85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도엑은 놉 지방에서 남녀와 아이와 소와 나귀, 양떼까지 다 죽였습니다. 놉 지방의 비극입니다.

놉 지방에서 이런 비극이 벌어질 때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한 명인 아비아달이 다윗에게로 도망갔습니다. 다윗은 놉 지방의 수많은 이들이 죽은 것을 자신의 탓이라 말하며 아비아달에게 자신과 함께 있기를 권했습니다.

다윗은 가드로 망명을 신청했다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습니다. 3절을 보면 다윗의 인식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라고 말을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에게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선지자가 나타나 그의 갈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나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었고 올바른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윗과 정반대였습니다. 사울은 다윗과 자신의 아들 요나단이 자신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고 말합니다. 또 다윗을 도와준 아히멜렉을 죽이기 위해서 누명을 씌우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제사장 85명을 죽이고 놉 지방을 초토화시키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가 이렇게 끔찍한 일을 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삐뚤어진 목표에 집중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 서기관 등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믿는 성경과는 달리 악을 저질렀습니다. 가난하고 힘든 이들, 낙심한 이들을 보살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님은 소외받은 이들과 함께하셨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열심히 살아왔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안타깝게 넘어지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하며 비난하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할지라도, 마음속으로는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에는 여전히 악한 부분이 남아 있으며,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비난하는 이들처럼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성이 있고, 연약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성도답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면 바른 길을 가게 되며, 올바른 삶의 방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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