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2일 칼럼
사진: Unsplash의Dennis Cortés

다윗을 죽이려던 사울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 일로 말미암아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는 진짜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윗은 요나단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사울이 자신에게 했던 일을 요나단에게 말합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의 말을 100% 믿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단이 볼 때, 아버지는 그렇게 악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울을 바라보는 다윗과 요나단의 관점 차이입니다. 다윗은 이미 사울이 자신을 죽이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반면 요나단은 “아버지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다윗과 요나단은 사울의 진심을 알기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초하루가 되면 다윗은 왕을 모시고 식사해야 합니다. 이것은 초하루 잔치라고 불리며, 한 달에 한 번 지키는 중요한 행사입니다. 심지어 안식일보다 더 중요한 절기였습니다. 다윗은 왕의 사위이자 군대의 대장이며, 궁정 음악가입니다. 따라서 그는 절대로 이 잔치에 빠질 수 없었고, 빠져서도 안 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요나단은 한 가지 시험을 해보기로 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찾으면, 요나단이 다윗이 매년제를 드리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갔다고 말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때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긍정적으로 반응하면, 사울은 아직 다윗을 죽일 마음이 없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반응하면 사울이 정말로 다윗을 죽이고 싶어 한다는 뜻입니다.

마침내 초하루 잔치가 열렸습니다. 첫날, 다윗이 보이지 않았지만 사울은 그냥 넘어갔습니다. 문제는 그다음 날이었습니다. 초하루 잔치 둘째 날에도 다윗이 보이지 않자, 사울은 요나단에게 다윗이 없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요나단은 “다윗이 매년제를 지켜야 한다고 하길래, 제가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사울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사울은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막말을 아들 요나단에게 내뱉었습니다.

요나단이 볼 때, 다윗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또한 다윗은 사울과 이스라엘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다윗은 이스라엘에 큰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울이 이런 다윗을 죽이려 하니, 요나단의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게다가 아버지가 자신에게 내뱉은 말까지 듣고 나니, 그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먹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왜 이렇게 요나단에게 화를 내고, 여전히 다윗을 죽이려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울이 다윗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은 다윗이 아니라 요나단이기를 바랐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뜻은 다윗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는 이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윗을 죽여서라도 요나단을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세우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의 진심을 알게 된 요나단은 다윗과 약속한 들로 갑니다. 그리고 화살을 쏘았습니다. 그 후 요나단은 몰래 들에 숨어 있던 다윗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서로 각자의 길을 떠났습니다.

다윗은 분명히 사울이 죄악된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요나단도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사실을 알았음에도 두 사람의 선택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누군가는 다윗을 향해 “더 버텨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 곁에 있을 수 있느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열왕기상 16장에 등장하는 아합 왕은 북이스라엘 여러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등장한 선지자가 바로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아합 왕의 신하 중에는 오바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궁내 대신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합 왕 몰래 하나님의 선지자 100명을 숨겨 보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야가 옳은 길을 선택한 것일까요? 아니면 오바댜가 옳은 길을 선택한 것일까요?

두 사람 모두 옳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다만, 그 길이 다를 뿐입니다.

다윗과 요나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옳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때로 우리는 자리를 지킬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첫째, 말씀입니다.

떠남과 기다림을 생각할 때, 성경에서 가장 큰 결정을 하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떠나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이 땅에서 공생애 기간 동안 머무셨습니다. 때가 되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곁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말씀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 옆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울 곁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 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사울을 떠나 도망쳤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자리가 있습니다. 부모의 자리, 자녀의 자리, 남편과 아내의 자리, 일하는 자리 등이 있습니다. 저는 목사의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자리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러한 자리를 떠나면 “잘했다”라고 말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가정을 깨고 떠나면 “잘했다”고 합니다. 남자와 남자가, 혹은 여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이렇게 말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자리에서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반대로, 때로 우리는 말씀대로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떠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자녀는 결혼을 합니다. 직장에 취업하면서 먼 곳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이사를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리를 옮길 때에도 말씀에 비추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둘째, 기다림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가기 전에 예수님께 “다른 사람은 다 예수님을 버려도 저는 절대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닭이 울기 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셨지만 베드로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돌아올 때까지 오래 참으시며 기다려 주셨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단창을 피하면서도 그의 딸 미갈과 결혼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혹시 “사울이 변하지 않을까?”라고 기대하며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르자 다윗은 사울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선하게 살아야 하고, 남을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한계입니다.
남을 도울 때도 우리의 한계 안에서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기다릴 때도 우리의 한계를 고려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기다림을 멈춰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지막,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물론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공동체가 존재했지만, 오늘날과는 그 형태가 달랐습니다. 교회는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한 몸입니다.

다윗이 사울 곁에서 버티려고 했던 이유도 바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머물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부르신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고,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부르심은 개인적인 부르심이지만, 동시에 공동체적인 부르심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혼자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더욱 성장합니다.

우리는 현재 있는 자리에서 공동체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또한 때로는 자리를 떠나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공동체를 위한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다림, 공동체를 기억하며 하나님이 주신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혹시 자리를 떠나야 할 경우가 생긴다 해도, 말씀과 기다림, 공동체가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의 자리를 잘 지키고, 떠나야 할 때에도 지혜롭게 떠나는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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