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주에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신 후, 먼저 이스라엘 땅에서 해야 할 사역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사역의 범위를 넓히셔서, 이스라엘을 넘어 더 폭넓은 사역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이스라엘을 넘어선 폭넓은 사역은 제자들에게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늑대들 가운데 양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그 양은 늑대에게 잡아먹히겠죠.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역이 바로 이 양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할 때 기쁘고 즐거운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조심해야 하고, 사람들 때문에 매를 맞거나 감옥에 갇힐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다가 생기는 일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때 우리 속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할 말을 알려 주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했는데도 인자가 오신다고 하십니다.
이 사역은 무척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결국 진리가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선과 악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끝까지 제자들을 돌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만 죽일 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을 멸할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사역을 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끝까지 제자들의 삶을 지켜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삶은 세상을 뒤흔드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간 곳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노예가 해방되었고, 잘못된 사회 질서가 바로잡혔으며,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습니다. 복음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좋은 것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만족, 명예, 권력 등을 소중히 여기며 살던 사람들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영원한 것, 천국,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영접하고 그들을 잘 섬기는 이들에게 상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고 난 후, 깨달은 것을 삶에 적용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모든 내용을 그대로 내 삶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적용할 때는 두 가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그 말씀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그 말씀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면, ’어떤 의미를 내 삶에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구약은 그 의미를 찾아서 적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신약은 그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고 이해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은 신약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첫 번째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두 번째에 해당하는지 신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나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이 오늘 본문에서 나온 일들을 실제로 겪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예루살렘 성이 무너졌을 때, 로마에서 복음이 전파될 때, 그리고 각 나라에 기독교가 들어갔을 때 본문에서 있었던 일이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이미 이루어졌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성도들만 경험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물론 이렇게 보면 우리가 이런 삶을 살지 않아도 되기에 우리의 마음은 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본문이 이렇게만 해석된다면, 우리에게 이 본문은 더 이상 의미가 없고 필요도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성경에서 없어도 ‘괜찮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이 해석은 옳지 않습니다.
첫 번째 해석을 지지하지 않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들이 “성도들도 그대로 경험하게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바로 우리는 이런 일을 ‘별로 경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을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도의 이중성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과 똑같이 밥을 먹고, 추우면 옷을 입어야 하며, 몸이 피곤하면 쉬어야 합니다. 일을 하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양육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봐도 성도나 불신자나 똑같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이중성입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불신자라면 주저 없이 그 기회를 이용해 돈을 많이 벌겠죠. 혹 부정직한 방법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지라도 아마 대부분은 돈을 벌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성도도 돈을 벌어야 하지만, 성경 말씀대로 정직하게 돈을 벌어야 합니다. 돈을 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있지만, 성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잘 생각하며 돈을 써야 합니다.
이것은 사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을 할 때도, 양육을 할 때도, 일상의 삶을 살 때도 매순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중성으로 말미암아 갈등하게 됩니다. 물론 신앙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는 갈등이 적습니다. 하지만 신앙 생활이 길어질수록 갈등이 점점 많아집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많이 알수록 세상의 길이 예수님의 길과 다르다는 것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건강하고 재물의 복도 누리고 만사가 형통하고 마음이 평안한 삶을 사는 것을 성도의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성도도 이 땅에서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중성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매순간 갈등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때로 갈등을 하면 ‘나는 믿음이 없구나, 나는 믿음이 약하구나’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실수도 많고 엉뚱한 길을 갔었고 거짓말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그가 갈등하며 겪었던 일입니다. 그가 수많은 갈등을 겪고 잘못된 길을 갔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이런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갈등 가운데 무엇을 바라보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실 상이었습니다.
운동 선수가 훈련을 합니다. 훈련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리고 훈련이 어려울 때마다 선수들은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훈련을 해야 하나?’라는 갈등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갈등 가운데서도 선수가 훈련을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훈련이 끝난 후 그들이 받을 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훈련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운동 선수가 받을 상은 더 큽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등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가 받을 상은 더 큽니다. 일상의 삶 가운데 갈등이 있다면 두 가지를 생각하십시오. 첫 번째는 이 갈등으로 말미암아 내가 얻을 상입니다. 두 번째는 이 갈등 가운데 나를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잘 생각하며 수많은 갈등 가운데 승리하고 상을 누리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