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어디에 숨어 계십니까?
본문 : 마태복음 23:29–39
이사 온 첫날,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했습니다. 팬트리에 숨었는데 센서등이 좀처럼 꺼지지 않았습니다. 겨우 불이 꺼지고 술래인 아들이 쓱 지나가자, 긴장이 풀려 몸을 움직였습니다. 그 순간 불이 다시 켜졌고, 저는 들키고 말았습니다. 숨바꼭질은 그렇게 끝났지만, 저는 여전히 숨습니다. 목사라는 직분 뒤에, 오십 대라는 나이 뒤에, 미소 뒤에, 괜찮은 척 뒤에.
사람이 처음 죄를 지었을 때 한 일도 숨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숨은 사람을 먼저 찾아오셔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마태복음 23장 29절부터 39절에는 아주 뜻밖의 곳에 숨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몄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왜 하필 죽은 선지자였을까요? 살아 있는 선지자는 “돌이키라”고 말하지만, 무덤 속의 선지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은 선지자는 나를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로 그때, 눈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시편 106편의 기도는 “우리가 우리의 조상들처럼 범죄하여”라고 고백합니다. 회개는 “나도 그들처럼”이라고 말하고, 자기 의는 “나는 그들과 달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번만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세례 요한을 보내시고, 마침내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휴대폰에 쌓인 부재중 전화처럼, 사람들은 처음에는 바빠서, 다음에는 알면서 받지 않다가, 결국 차단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받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전화를 건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렇게 쌓인 의로운 피가 그 세대에 돌아간다고 예수님은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경고 끝에서 예수님의 목소리가 바뀝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독사라고 부르신 그들을, 병아리처럼 품으려 하셨습니다. 피할 곳은 꾸민 무덤이 아니라 그분의 날개 아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날개 아래 병아리가 아니라, 날개를 펴는 암탉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하나님의 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였습니다.
며칠 뒤, 그들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아벨의 피처럼 “갚아 주소서”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죄 사함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선지자의 무덤을 꾸몄지만, 예수님은 자기 무덤을 비우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셔서 택하신 자들을 사방에서 모으실 것입니다.
이번 주, 세 가지 질문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어떤 무덤을 꾸미고 있는가. 혹시 받지 않은 전화가 있는가. 우리는 같은 날개 아래 모인 사람들인가. 이 질문 앞에서 마음이 무거워진다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회개 점수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일에 달려 있다는 것도 함께 기억하십시오.
숨은 아담을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이 오늘도 물으십니다. 어디에 숨어 계십니까? 무덤은 나를 가려 주지만, 날개는 나를 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