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가 없어도 예수님을 찾으십니까?
마태복음 22:41-46
영아부 예배에는 많은 아이들이 옵니다. 한 명 한 명 안아 주고 싶지만, 모든 아이가 저에게 오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 가장 쉬운 방법이 과자를 주는 것입니다. 낯을 가리던 아이도 과자를 받으면 쪼르르 달려옵니다. 몇 번 그렇게 하니 아이는 과자를 받으러 저에게 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이 아이에게 저는 ‘과자 잘 주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아이가 과자도 없이 저에게 폭 안겼습니다. 곁에 있던 엄마가 깜짝 놀랐습니다. 낯선 사람에서 과자를 주는 사람으로, 그리고 과자가 없어도 안기고 싶은 사람으로. 아이가 저를 알아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예배에 오면 인사하고 안깁니다. 물론 과자도 줍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마 22:42) 마태복음 21장 23절에서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으신 뒤, 예수님은 두 아들과 포도원과 혼인 잔치 이야기를 하셨고, 세금과 부활과 계명을 묻는 세 개의 함정을 지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질문하는 쪽이 바뀝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려고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물으십니다.
그들은 대답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틀린 대답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시편 110편 1절에서 다윗은 노래합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다윗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성령께서 다윗을 통해 하신 말씀입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내 주’라 불렀다면, 어떻게 그분이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시대에 조상이 후손을 ‘주’라 부르는 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면서, 다윗의 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라고 말씀하셨고(요 8:58), 구약의 사람들은 아직 오지 않은 그분을 믿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 답은 이미 마태복음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포도원 이야기에서 주인은 종들 다음에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냅니다. 혼인 잔치도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잔치입니다. 세금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악의를 아시는 분이셨고(22:18),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내 주’라 부르는 분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분입니다. 마태복음은 이 조각들에 이름을 붙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곧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평생 성경을 공부한 사람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고, 그날부터 아무도 감히 묻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과자 주시는 분, 필요한 돈을 주시는 분, 건강을 책임져 주시는 분, 위로자 정도로만 알면 필요한 때만 찾게 됩니다. 그렇게 찾아오는 것도 잘못은 아닙니다. 필요합니다. 과자를 달라고 온 아이를 쫓아내는 부모는 없습니다. 다만 거기서 멈추면 아쉽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나의 주인이시고, 나의 구원자이시며,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힘들 때에는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기쁠 때에는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찾게 됩니다. 필요할 때만 찾는 분이 아니라, 어떤 때에라도 함께하고 싶은 분이 됩니다. 일이 꼬이고 답답하고 우울해도, 일이 잘 풀리고 재정이 넉넉하고 좋은 일이 많아도, 우리는 그분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이 앎도 우리 힘으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저를 알기 전에 제 마음이 먼저 그 아이를 향해 있었듯이,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요일 4:19). 말로는 예수님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택한 길은 십자가였지만, 바로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마 1:21)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가 설 수 없던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이번 한 주, 필요한 것이 없는 순간에 한 번,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가 보시면 좋겠습니다.
과자가 없어도 예수님을 찾으십니까? 다윗은 성령에 감동되어 그분을 ‘내 주’라 불렀습니다. 그분이 오늘, 나의 주가 되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