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27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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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마태복음 22:23-33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부활에 대해 질문합니다. 배우려는 게 아니라, 조롱하고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일곱 형제가 차례로 한 여자와 결혼했다가 모두 죽은 극단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묻습니다. “부활 때에는 그 여자가 누구의 아내입니까?” 이 질문 속에는 그들의 잘못된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부활 이후도 현재와 똑같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정확히 진단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여기서 “오해하였다”는 단순히 잘못 알았다는 뜻이 아니라,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방향 자체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도 잘 알고, 돈도 권력도 가졌지만,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하나님도 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성경을 잘 알기 위해 애써야 올바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로 답하십니다. 첫째, 부활 이후의 삶은 이 땅과 다릅니다.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결혼이라는 제도는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온전한 연합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완성됩니다.

둘째,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글을 인용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아브라함은 육체적으로 죽었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그의 하나님이라 말씀하십니다. 죽음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를 끝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살아 있다”는 것은 단지 숨 쉬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완전한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집니다. 그때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중간 상태”에 있습니다. 아직 새로운 육체를 입지는 못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픈 것은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그 고통 곁에 더 큰 것을 보게 합니다. 죽음 너머의 생명, 눈물 너머의 약속, 현재 너머의 영원입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아픔도, 그날에는 “하나님께서 그때도 나를 놓지 않으셨구나”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들은 사두개인들은 놀랐습니다. 그러나 놀라움이 곧 믿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 아픔 가운데 있다면 그 아픔을 부정하지 말고, 그 곁에 하나님이 계심을 붙드십시오. 먼저 떠나보낸 이가 있다면, 그를 잃어버린 존재가 아니라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는 존재로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막연한 상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죽으셨고, 실제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이십니다(고전 15:20). 그분이 사셨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핵심질문: 나는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죽음마저 끊을 수 없는 것으로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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