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 재생 프로젝트
– 자격을 따지지 않고, 나를 고치기 시작하셨다 (마태복음 21:12-17)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의 자랑이었습니다. “헤롯 성전을 보지 못한 자는 아름다운 건물을 논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 안, 유일하게 이방인도 들어올 수 있었던 이방인의 뜰이 시장통이 되어 있었습니다. 환전상의 동전 소리, 제물로 팔리는 짐승들의 울음소리, 흥정하는 고함이 뒤섞여 기도할 틈조차 없었습니다. 가장 열려 있어야 할 문이, 가장 시끄러운 자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상을 뒤엎으셨습니다(12절). 이 행동은 순간적인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곧이어 예수님은 두 구약 본문을 인용하십니다. 이사야 56장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과 예레미야 7장 “너희는 이것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도다”입니다. 이사야는 성전의 너비를 말합니다 — 누구든 들어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예레미야는 성전의 방식을 말합니다 — 삶이 정직하지 않은 채 제사만으로 안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 넓게 열려야 했던 문은 닫혀 있었고, 정직해야 했던 삶은 죄를 숨기는 굴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뒤엎으신 것은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손이 곧바로 전혀 다른 일을 하십니다. 맹인과 저는 자들이 나아오자, 손을 내밀어 그들을 만지시고 고쳐 주십니다(14절). 평소 성전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이들이 걸어 들어오는 자리가 된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노했지만, 정작 어린아이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가장 많이 아는 사람들이 못 알아보고, 가장 자격 없다 여겨지던 이들이 정확히 알아본 것입니다.
성전에서 상을 뒤엎으실 권위, “내 집”이라 선포하며 소유를 주장하실 권위,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치유의 권위, 원래 하나님께만 드려지는 찬양을 스스로 받으신 권위. 이 네 가지를 함께 가지신 분은 성전의 관리자가 아니라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말라기가 예언한 대로, 주께서 갑자기 그 성전에 임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너희”는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인 이 자리가 성전이라면, 우리는 자격을 따지지 않고 누구든 나아올 수 있는 공동체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는 나도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안전하고 싶은 마음, 바빠서 기도할 틈이 없다는 핑계가 내 안에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격을 따지지 않으신다는 말이 죄가 문제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늘 뒤엎으셨던 그 손이, 훗날 십자가에서 못 박히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충분히 깨끗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값을 대신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성도의 정체성이 어려움이 아니라,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성전이 회복되자 맹인이 눈뜨고 저는 자가 걸었으며, 그 회복은 치유로, 치유는 찬양으로 흘러갔습니다. 자격을 따지지 않고 받은 사랑은, 이제 자격을 따지지 않고 누군가를 맞아들이는 삶으로 흘러갑니다.
재개발은 있던 것을 밀어버리고 새로 짓지만, 재생은 그 자리에 살던 사람을 그대로 두고 되살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밀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자격을 따지지 않고, 나를 고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번 주 나눔 질문
“예수님은 이미 나를 딸칵, 고정시키셨습니다. 나는 지금 그 고정을 믿고 삽니까, 아직도 기우뚱한 텐트처럼 삽니까?”
1. 내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먼저 자리를 차지한 것은 무엇입니까?
2.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성전 밖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3. 많이 안다고 여기면서, 정작 눈앞의 은혜는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4. 값없이 받은 그 사랑이, 내 안에서 멈춰 있지는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