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8.2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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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맹인입니까? (마태복음 20:29-34)

어느 날 학교에서 친구가 매직아이 책을 가져왔습니다. 복잡한 패턴만 가득한 페이지였는데, 친구는 “눈을 이렇게 초점을 흐리게 뜨고 보면 그림이 보여”라고 했습니다. 몇몇 친구들은 “와, 코끼리 보인다!”며 신기해했습니다. 저는 아무리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같은 눈, 같은 페이지를 보고 있는데 저 혼자만 아무것도 못 보는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서야 저도 보이더군요.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눈은 똑같았는데 누군가는 보고 누군가는 못 봤습니다. 본다는 게 그냥 눈이 뜨여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표고차 약 1,000m, 거리 약 27km, 꼬박 하루가 걸리는 오르막길입니다. 그 길 끝에는 유월절이, 그리고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곧 있을 환호에 들떠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다들 앞만 보고 걷습니다. 그런데 그 길가에,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께 무언가를 구했습니다.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오늘 이 두 사람도 구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리를 구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애초에 구할 자리가 없습니다. 그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칠 뿐입니다. 사실 이 호칭은 그냥 예의상 붙인 말이 아닙니다. 오래전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가 오시면 맹인의 눈이 밝아질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 두 사람이, 오히려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이 이름을 부르고 있었던 겁니다.

무리가 꾸짖습니다. 조용히 하라고, 시끄럽다고. 이 무리, 낯설지 않습니다. 며칠 뒤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를 외치고, 또 며칠 뒤엔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를 외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두 맹인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크게 외칩니다. 세상이 조용히 하라고 할 때, 오히려 더 크게 부르짖어야 할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걸음을 멈추십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에게 물으셨던 것과 같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대답이 다릅니다. 어머니는 왕관 곁의 자리를 구했고, 두 맹인은 그저 “눈뜨기를” 구했습니다. 정작 자리를 구했던 제자들은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고, 시력을 구했던 맹인들은 이미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정확히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손을 뻗어 그들의 눈을 만지십니다. 말씀 한마디로도 고치실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손을 대십니다. “민망히 여기사” — 원어로는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긍휼입니다. 마태복음 전체에서 오직 예수님께만 쓰이는 감정입니다.

여기서 잠깐 오늘 본문을 다시 돌아보면, 두 눈으로 예수님을 보면서도 자리를 구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가 맹인입니까. 어린아이를 막았고, 오늘은 맹인을 막아선 손이 있었습니다. 누가 맹인입니까. 며칠 뒤엔 호산나를, 또 며칠 뒤엔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칠 그 무리가 있었습니다. 누가 맹인입니까. 그런데 앞이 보이지 않던 두 사람은 처음부터 정확히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눈을 뜬 사람들이 못 보고, 눈이 먼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마태는 여기서 그냥 “고침을 받았다”로 끝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한 문장을 더 씁니다. “곧 보게 되어 예수를 따르니라.” 눈을 뜬 것은 기적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을 뜨자마자 예루살렘을, 십자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구한 것은 시력이었지만, 받은 것은 제자의 눈이었습니다.

언젠가 새벽 기도회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낯선 분들이 큰 기도 제목을 가지고 열심히 나오시다가도, 응답을 받고 나면 대부분 더 이상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다 되었구나”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도 오늘 무언가를 구하고 있습니다. 승진을, 자녀의 앞날을, 건강을, 인정을.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받은 다음입니다. 우리는 종종 응답받으면 거기서 멈춥니다. “이제 됐다”며 각자의 길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두 맹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을 받는 순간이 신앙의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순간이 예수님을 따라 걷기 시작해야 할 진짜 시작입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분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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