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7.26 칼럼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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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때 한 신앙서적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고, 몇 배의 축복을 받았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저도 따라 해보고 싶었습니다. 타던 오토바이만 남기고 통장의 돈, 저금통의 잔돈까지 전부 헌금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저는 그 뒤로 꽤 오랫동안 힘들게 지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압니다. 저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돈을 많이 받고 싶은 마음을 함께 품고 있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구하는지, 저 자신도 몰랐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도 똑같은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세 번째로 가장 상세하게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넘겨짐, 사형선고, 이방인, 조롱, 채찍질, 십자가, 그리고 부활까지. 그런데 이 무거운 말씀이 끝나자마자 마태는 “그 때에”라고 시작합니다. 시간차 없이, 한 어머니가 무릎을 꿇고 청합니다. “당신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을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청년은 “무엇을 하여야”라고 물었고, 베드로는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고, 포도원 품꾼은 “더 받을 줄 알았더니”라고 원망했습니다. 오늘은 그 계산이 가장 노골적인 모습으로 터집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눈감아주지도 않으십니다. 이건 위로가 아니라 정확한 진단입니다. 사람에게는 동전의 양면 같은 이중성이 있습니다. 목사는 교회의 부흥을 바라면서 동시에 “어떻게 이렇게 성도가 모였습니까”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잘 살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그렇게 믿음으로 자녀를 키우셨어요”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둘 다 진짜입니다. 그래서 더 어렵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주의 나라에서”라는 말 속에, 주님 나라를 구하는 마음과 내 아들 자리를 구하는 마음이 함께 뒤섞여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내가 마실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물으십니다. 성경에서 잔은 단순한 고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과 진노를 담은 잔입니다. 예수님은 그 잔을 향해 올라가고 계셨는데, 제자들은 왕관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붙잡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예수님 앞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은혜입니다. 그들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부름받았습니다. 은혜가 먼저 오고, 이해는 따라가면서 조금씩 옵니다. 준비를 다 갖춘 뒤 오려던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지만,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채 “할 수 있습니다”라고 서투르게 답한 이 두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걷습니다.

열 제자가 분히 여깁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욕심 자체보다, 그들이 먼저 움직였다는 데서 온 분노일 수 있습니다. 누가 승진 소식을 전하면 웃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씁쓸한 것처럼, 겉으로 화낼 명분은 도덕이지만 속에서 타는 건 질투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방식을 짚으십니다. 이방인의 통치자들은 위에서 아래를 누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길 위에 있습니다. 위로 올라가면서 아래로 누를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명하십니다.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라고. 은혜로 부름받았다고 욕망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기에, 이 명령이 필요합니다.

그 명령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제자들은 계속 움직여서 받으려 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넘겨지시고 조롱당하시고 채찍질당하시는, 남의 손에 붙잡혀 당하시는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한복판에서 스스로 내어주십니다. 두 형제는 정말 그 잔을 마셨습니다. 야고보는 훗날 순교로 그 잔을 마십니다. 하지만 그들이 마신 잔은 박해와 순교의 잔이고, 예수님이 마신 잔은 죄의 값을 다 담아낸 진노의 잔입니다. 대속물이 필요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상태가 “그 정도면 괜찮다”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어머니가 구했던 “우편과 좌편”이라는 표현은 이 복음서 뒷부분에 다시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우편과 좌편에 있던 자들은 강도 둘이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구하던 자리에, 결국 제자가 아니라 강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예수님 홀로 계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왕관을 구하던 그 자리에, 예수님은 잔을 들고 서 계셨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자리를 구합니다. 여전히 무엇을 구하는지 다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우리를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구하던 그 자리에, 이미 예수님이 먼저 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 이 질문 하나를 붙잡으십시오. “나는 지금 내 욕망에 머물러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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