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사역하던 교회에 막 부임하신 목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곳 목사님들은 대부분 제가 10년 넘게 알고 지낸 분들이었는데, 그분만은 달랐습니다.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수요일마다 일을 벌이셨습니다. 점심을 먹고 서너 시쯤, 배가 애매하게 출출해질 시간이면 — 교회 앞 아파트 단지에서 호떡을 파는데, 그 호떡을 사오시는 겁니다. 처음엔 ‘한두 번 그러시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 수요일도, 그다음 주 수요일도 — 매주 그러셨습니다.
저는 그분께 특별히 잘해드린 게 없었습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매주 저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나중에 보니 저한테만이 아니라 사무실의 모든 목사님께 똑같이 그러셨습니다. 그냥 그분은 원래 그런 분이셨습니다. 자격을 따지지 않고 먼저 다가오는 것.
오늘 본문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다만 호떡이 아니라 — 훨씬 더 무거운 용서가 오갑니다.
압살롬의 반역이 진압됐지만, 다윗이 다시 왕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압살롬에게 기름 부어 정식으로 왕을 세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유다 지파조차 압살롬 편이 많았습니다. 압살롬이 4년 동안 성문 앞에서 백성들의 손을 잡고 환심을 샀는데, 그 작업이 가장 깊이 먹힌 곳이 바로 자기 본거지인 유다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유다는 다윗에게서 가장 멀리 가 있던 지파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압살롬 편에 섰던 유다 장로들에게 “너희는 내 형제다, 내 뼈와 살이다”라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심지어 압살롬 군대의 사령관이었던 아마사를 자신의 군대 사령관으로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지금까지 충성스러웠던 요압을 빼고 말입니다. 정치적으로 위험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했습니다.
백성이 먼저 다윗을 찾은 게 아닙니다. 자격을 따지지 않고, 왕이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렇게 다윗이 요단강에 도착했을 때, 시므이가 누구보다 빨리 달려왔습니다. 다윗이 도망가던 그날, 산기슭을 따라가며 끝까지 돌을 던지고 저주를 퍼부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그때 다윗 곁의 아비새가 “저 죽은 개의 머리를 베겠습니다” 했지만, 다윗은 말리며 그 모욕을 다 받아냈습니다.
그 시므이가 베냐민 사람 천 명을 데리고 와서 다윗 앞에 엎드렸습니다. 정말 미안해서였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영향력을 보여주며 살아남으려는 계산이었을까요. 아마 둘 다였을 겁니다. 우리도 잘못을 빌 때 그렇지 않습니까. 진심과 계산이 늘 함께 있습니다.
그때 아비새가 끼어듭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했으니 죽어 마땅하지 않습니까?” 틀린 말이 아닙니다. 법대로 하면 시므이는 죽어야 합니다. 아비새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다윗 편이었습니다. 다만 정의만 있을 뿐, 다른 게 없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윗의 대답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오늘 너희가 나의 원수가 되겠느냐? 오늘 어찌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 왕이 된 것을 모르겠느냐?” 두 절 안에서 ‘오늘’이 세 번 나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고대 근동에는 왕이 즉위할 때 사면을 베푸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지금 그것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시므이가 산 이유를 다시 보십시오. 그가 먼저 달려와서도, 잘못을 빌어서도, 정치적으로 쓸모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만약 그 모든 걸 갖췄어도 다윗이 돌아오는 날이 아니었다면 그는 죽었을 겁니다. 오늘이 왕이 돌아온 날이었기 때문에 살았습니다.
시므이는 자격으로 산 게 아니었습니다. 날이었기 때문에 살았습니다.
아비새는 여전히 옳습니다. 율법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왕이 돌아온 그날, 정죄가 마지막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게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매일 삶으로 하나님께 돌을 던지며 살아왔습니다. 법대로 하면 우리도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정죄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그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산 이유도 시므이와 똑같습니다. 예배를 잘 드려서도, 헌금과 봉사와 전도를 많이 해서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시므이처럼 들고 달려갈 때가 있습니다. “제가 이만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걸 다 내려놓아도 우리는 여전히 삽니다. 왕이 돌아오신 날, 부활하신 그날이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님이 매주 호떡을 사오신 이유는 제가 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격을 따지지 않는 그분의 성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크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돌을 던지던 그 시간에도, 우리에게 자격이 없었던 모든 순간에도 — 왕이 먼저 돌아오셨습니다.
왕은 시므이를 용서한 게 아니었습니다. 왕은 그날을 선포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 날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오늘이 그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