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다 이겼지만 다 잃은 것 같은 날
살면서 이런 날이 있습니다.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는데 기쁘지 않은 날. 이겼는데 다 잃은 것 같은 날.
오늘 본문의 다윗이 바로 그런 날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반역이 진압됐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습니다. 압살롬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아히마아스가 달려가겠다고 했지만 요압이 말렸습니다. “오늘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날이 아니다. 왕의 아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히브리어 베소라(בשורה) — 좋은 소식 — 가 네 번 반복됩니다. 성경이 묻고 있습니다. 진짜 좋은 소식이 무엇인가?
아히마아스는 포기하지 않고 세 번이나 요압을 졸랐습니다. 상을 받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다윗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나쁜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름길로 달려서 먼저 도착했고 — 막상 다윗 앞에 서니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나쁜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윗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성문 위에서 기다렸습니다. 첫 번째 전령 아히마아스가 도착했습니다. 다윗이 물었습니다. “압살롬은 잘 있지?” 확신에 가까운 질문이었습니다. 아히마아스가 얼버무렸습니다. 두 번째 전령 구스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이번엔 다윗의 질문이 달라졌습니다. “압살롬은 무사한가?” 히브리어 원문은 의문문입니다. 기대가 불안으로 바뀐 겁니다. 구스 사람이 돌려 말했지만 — 다윗은 알아들었습니다.
다윗이 성문 위 방으로 올라가 울었습니다. 33절에서 “내 아들”을 다섯 번, “압살롬”을 세 번 불렀습니다. 19장 4절에서 또 한 번 통곡했습니다. 그 짧은 순간 다윗은 아들을 일곱 번, 압살롬을 다섯 번 불렀습니다.
승리한 그날이 온 백성에게 초상날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도둑처럼 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다 이겼지만 — 다 잃은 것 같은 날이었습니다.
요압이 다윗에게 찾아와 말했습니다. “왕을 사랑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날카로운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압은 압살롬을 죽인 장본인이었습니다. 그 요압이 “일어나라”고 말하는 아이러니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일어났습니다. 슬픔이 끝나서가 아닙니다. 왕의 자리가 그를 일으켰습니다.
이제 두 전령의 보고에 담긴 단어를 보겠습니다. 아히마아스와 구스 사람 — 서로 다른 사람이 같은 단어를 씁니다. 히브리어 샤파트(שָׁפַט) — “판결하다.”
다윗이 쫓겨나던 그 긴 시간 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압살롬이 왕좌에 앉고 민심이 돌아섰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두 전령의 입에서 같은 단어가 나왔습니다.
샤파트. 판결하셨다.
하나님은 침묵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그 긴 시간 내내 — 판결하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의 날도 그랬습니다. 하늘은 어두워지고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사흘 후 빈 무덤이 선언했습니다. “이 분이 옳다. 죄와 사망이 그르다.” 하나님의 침묵은 포기가 아닙니다. 판결을 준비하시는 시간입니다.
요압은 말했습니다. “아들이 죽었으니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진짜 좋은 소식을 만드셨습니다. 나쁜 소식을 통과해서만 오는 좋은 소식 — 그것이 복음입니다.
다윗은 슬픔이 끝나서 일어난 게 아닙니다. 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슬픔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부활 안에서 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