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6.7 칼럼
2026.6.7 칼럼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결과에 있습니다. 다윗이 이기느냐, 지느냐. 반역이 진압되느냐, 성공하느냐. 그런데 본문을 천천히 읽다 보면 — 성경의 카메라가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궁에서 쫓겨났습니다. 맨발로 감람산을 오르며 울었습니다. 그런데 마하나임까지 도망쳐 온 다윗에게 예상 밖의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소비는 다윗이 정복한 암몬 사람이었고, 마길은 사울 가문 쪽 사람이었고, 바르실래는 이 지역의 노인이었습니다. 적국 사람, 전 왕조 쪽 사람, 낯선 지방 사람 — 압살롬이 예루살렘 왕궁을 차지하던 그 시간, 광야의 도망자 왕 곁에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전쟁은 에브라임 수풀에서 벌어졌습니다. 굉장히 험한 땅이었습니다. “칼에 죽은 자보다 수풀에서 죽은 자가 더 많았다.” 땅 자체가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진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그의 자랑이었던 머리카락 — 1년에 한 번 깎는데 무게가 2킬로그램이 넘었던 — 그것이 상수리나무에 걸렸습니다. 자랑이 올무가 되었습니다. 요압이 그를 죽였습니다. 전쟁이 끝났습니다. 땅도, 사람도, 심지어 나무까지 다윗 편이었습니다. 왕이 이겼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전쟁을 기록하면서 한 단어를 네 번 반복합니다. ‘나아르’ — 소년. 다윗이 출전 명령을 내릴 때, 병사가 보고할 때, 다윗이 전령을 기다릴 때, 구스 사람이 소식을 전할 때 — 압살롬은 계속 ‘소년’으로 불립니다. 압살롬은 소년이 아닙니다. 결혼도 했고 자녀도 있습니다. 반역을 일으킨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눈에 그는 끝까지 — 소년이었습니다.

성경의 카메라는 처음부터 전쟁터가 아니라 아버지 다윗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직접 전쟁터에 나가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압살롬을 죽이려 한 게 아니라 살리려 했던 것 같습니다. 백성들이 막았습니다. 다윗은 출전하는 지휘관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모든 백성이 들을 만큼 크게.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히브리어 원문은 ‘레아트 리’ — 나를 위해, 부드럽게. 왕의 명령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간청입니다.

그러나 요압은 그 명령을 어겼습니다.

승전보가 들어오던 그 시간, 다윗은 성문 위 다락방에서 전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전령이 왔습니다. “하나님이 승리를 주셨습니다.” 다윗의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소년 압살롬은 평안하냐?” 전쟁의 승패가 아닙니다. 아들 하나입니다. 두 번째 전령이 왔습니다. “왕의 원수들이 다 그 소년 같이 되기를.” 돌려 말했지만 다윗은 알아들었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다락방으로 올라가 울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왕은 이겼습니다. 아버지는 졌습니다. 다윗은 살리고 싶었지만 — 막지 못했습니다.

압살롬이 나무에 달린 장면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히브리어로 ‘탈루이’ — 매달린 자. 신명기 21장 23절은 말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 압살롬의 죽음은 단순한 전사가 아닙니다. 율법이 선언하는 저주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18절. 압살롬은 살아있을 때 왕의 골짜기에 자기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히브리어로 ‘야드’ — 손. “내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으니 내 손으로 세우겠다.” 그런데 죽어서 그가 묻힌 곳은 이름 없는 구덩이였습니다. 자기 손으로 이름을 세우려 한 자가 — 이름 없이 묻혔습니다.

압살롬의 죄는 단순한 불효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대적했습니다.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고, 왕의 이름 대신 자기 이름을 세우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왕의 말씀을 어기고, 왕의 이름 대신 내 이름을 드러내며 살아왔습니다. 압살롬이 다윗의 왕좌를 빼앗으려 했던 것처럼 —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으려 했습니다. 우리도 나무에 달려 죽어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13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예수님이 그 자리에 달리셨습니다. 압살롬이 달린 자리, 저주받은 자의 자리, 반역자의 자리에. 끌려가신 게 아닙니다. 스스로 오신 왕이 — 반역자의 자리에 자원해서 달리셨습니다.

여기서 두 아버지의 대조가 완성됩니다.

다윗은 죄 있는 아들을 살리고 싶었지만 — 막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죄 없는 아들이 죽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만 — 막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은 무력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셨습니다. 천사 하나로도, 말씀 한 마디로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지 않으셨습니다. 뜻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더 큰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역한 우리가 저주의 자리에서 죽지 않도록.

다윗은 아들을 잃고 울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고 — 우리를 얻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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