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4.26 칼럼
ChatGPT 생성

우리는 정말 화해했을까?

한 부부가 있습니다. 크게 싸운 것도 아닙니다. 그냥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겼고, 시원하게 화해를 하지 않은 채 지내고 있습니다. 다음 날, 아내는 평소처럼 남편의 옷을 다리고 아침을 차립니다.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려고 장도 봅니다. 남편도 열심히 일하고 퇴근하면 집에 들어옵니다. 겉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화해하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벽이 있습니다. 형식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습니다.

사무엘하 14장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5년 만에 아버지와 아들이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압살롬은 형 암논을 죽이고 외가가 있는 그술로 도망가 3년을 보냈습니다. 겨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 다윗은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습니다. 몸은 예루살렘에 있었지만 사실상 감금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렇게 또 2년. 무려 5년 만에 부자가 마주 앉았습니다. 그런데 읽고 나면 이상하게 씁쓸합니다. 화해처럼 보이는 이 장면 안에 — 진짜 화해가 있었는가.

압살롬은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르며 아버지 앞에 나아갔습니다. “내게 죄가 있으면 죽이라”는 말은 회개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정당했다고 확신했습니다. 암논이 다말을 욕보였는데 다윗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대신 정의를 세웠을 뿐인데, 내가 무슨 죄가 있냐. 자기 힘으로, 자기 외모로 자리를 되찾으러 온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의 탕자는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겸손하게 걸어왔습니다. 압살롬은 밭에 불을 지르며 왔습니다. 훗날 그 자랑스러운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그를 죽음으로 이끌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왕이 되려 한 사람의 끝이었습니다.

드디어 다윗이 압살롬을 불렀습니다. 33절을 보면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이 구절에 ‘아버지’도 없고 ‘아들’도 없습니다. ‘다윗’이라는 이름도 없습니다. 오직 ‘왕’만 있습니다. 성경 기자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썼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야 할 자리에 왕과 신하가 만났습니다. 당시 입맞춤은 화해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이 입맞춤에는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다윗의 죄가 그를 마비시켰습니다. 진심으로 용서하려면 먼저 자신의 실패를 마주해야 했는데, 그 어려운 대화를 두려워한 그는 형식적으로 입만 맞추었을 뿐입니다. 15장에서 압살롬이 곧바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요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압살롬이 두 번이나 불렀는데도 오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눈치를 보았고 자신의 자리가 걱정되었습니다. 밭에 불이 나고서야 어쩔 수 없이 움직였습니다. 메시지만 전달하고 끝이었습니다. 진정한 중재자는 두 사람의 마음을 이어줍니다. 요압은 택배 기사였지, 중재자가 아니었습니다.

회개가 있어야 할 자리에 회개가 없었습니다. 용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용서가 없었습니다. 중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중재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인 다윗이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회개, 진짜 용서, 진짜 중재는 어디서 오는가. 사람에게서는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방법을 강구하셨습니다. 창세 전에 이미 우리를 선택하신 성부 하나님이 다윗이 실패한 그 자리에 먼저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이 요압이 하지 못했던 중재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압살롬이 끝내 하지 못했던 그 회개를 가능하게 하십니다. 세 사람이 비워둔 그 자리에 — 삼위일체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짜 아버지이셨습니다. 자격을 증명하러 오지 마십시오. 그냥 오십시오. 하나님이 이미 방법을 강구해 두셨습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