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손절의 시대 하나님의 연결
제가 예전에 살던 도봉산 밑에는 작은 천이 있었습니다. 비만 오면 물고기가 많이 올라왔습니다. 하루는 아이들 앞에서 큰소리쳤습니다. “아빠가 잡아줄게.” 대학도 나왔고 두뇌 용량도 물고기보다 크니 — 쉽게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아이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그때 물고기 한 마리도 못 잡았죠?” 결국 돈을 주고 제대로 된 도구를 사고 나서야 많이 잡을 수 있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내가 똑똑하다, 내가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해 보였던 계획에 차질이 생깁니다. 우리의 손은 물고기를 잡기에도, 인생을 붙들기에도 참 작고 미끄럽습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그런 연약함과 악함을 보여주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세 사람의 이야기
다윗의 아들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성폭행했습니다. 압살롬은 다말에게 “조용히 해라”고 했고 — 2년 뒤 양털깎는 잔치에서 암논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고향 그술로 도망쳤습니다. 세 사람이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압살롬은 3년째 외국에서 망명 중입니다. 다윗은 아버지로서 압살롬을 벌해야 하고 왕으로서는 후계자가 필요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머물렀습니다. 요압은 이 상황을 바꾸려 했습니다.
요압의 반쪽짜리 지혜
요압은 현실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다윗의 우유부단함이 왕조를 흔들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압살롬이 외국에 오래 있으면 위험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드고아에서 지혜로운 여인을 데려와 대본을 짜고 다윗 앞에서 연기하게 했습니다. 결국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성공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요압의 결말을 보십시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요압은 다윗의 부탁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였습니다. 나중에는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했다가 솔로몬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평생 영리하게 움직였지만 — 마지막은 죽음이었습니다.
요압은 용맹했고 노련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획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욕심이 섞여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는 계획은 — 아무리 정교해도 반쪽입니다.
속임수 대본 안에서 터진 진리
여인은 다윗에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저는 과부입니다. 두 아들이 싸우다가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였습니다. 온 가문이 살인한 아들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다윗이 맹세했습니다.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으리라.” 그 순간 여인이 본론을 꺼냈습니다. “왕은 왜 쫓겨난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않으십니까?”
다윗은 자신이 한 말에 묶여 — 어쩔 수 없이 압살롬을 데려오게 됩니다. 그런데 14절에서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
이 말은 요압의 대본이었습니다. 그들은 의미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어설픈 입술을 빌려 — 인류를 향한 당신의 심장을 보여주셨습니다. 속임수 대본 안에서 — 가장 깊은 복음이 나왔습니다.
여기서 두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13절과 14절에 반복되는 히브리어 하솨브 — 계획입니다. 다윗은 사람을 쫓아내는 계획을 세웠지만 하나님은 쫓겨난 자를 데려오시는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 쫓겨난 자를 가리키는 단어가 니다흐입니다. 밀려난 자, 버림받은 자. 스스로의 힘으로는 돌아올 수 없는 단절의 상태입니다.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니다흐 되었습니다. 암논은 다말을 버렸습니다. 압살롬도 다말을 내버려뒀습니다. 다윗도 압살롬을 내버려뒀습니다. 이것이 죄의 패턴입니다. 동쪽으로 간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동쪽으로 내몹니다. 버림받은 자가 또 다른 사람을 버립니다. 우리 모두가 니다흐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30장 4절은 말합니다.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라.”
다윗은 반쪽, 하나님은 완전
다윗은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24절에서 말했습니다. “그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다윗은 성문은 열어주었으나 마음의 문은 굳게 닫아걸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가진 용서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성전의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르는 장벽이었습니다. 대제사장도 1년에 단 한 번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모두 니다흐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내뱉으실 때 — 그 두꺼운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사람이 찢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당신의 가슴을 찢듯 그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다윗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동쪽으로 이어지던 패턴이 끊어졌습니다. 니다흐 된 우리가 — 아버지의 얼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니다흐인 분이 계십니까?
스스로 쫓겨났다고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누군가에게 버려진 채 외로운 섬처럼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어쩌다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창세 전부터 준비된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계획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요압의 계획은 반쪽이었습니다. 다윗의 계획도 반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 완전합니다.
이제 그 사랑 앞에 나오십시오. 동쪽으로 내모는 세상을 등지고 — 휘장을 찢어 얼굴을 보여주시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