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4.12 칼럼
동쪽으로 간 사람, 서쪽에서 오신 분

1. 들어가는 말

군대 전역을 며칠 앞두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전역하면 계획대로 잘 살아야겠다.’ 전역한 지 30년 가까이 되었지만 제 삶은 제가 세운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참 제가 무능하다,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2. 압살롬 — 포장된 죄

오늘 본문 23절은 “그 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앞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첫째 아들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성폭행했습니다. 다말은 저항하고 애원했지만 암논은 듣지 않았습니다.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이 왔지만 “잠잠하라”며 그녀의 입을 막았습니다. 아버지 다윗은 자신의 죄 때문에 화만 내고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났습니다.

압살롬은 바알하솔에서 양털 깎는 잔치를 열고 암논을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술에 취한 암논을 종들을 시켜 죽였습니다. 2년 동안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속으로는 치밀한 계략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분노와 욕망을 정의로 포장했습니다. 다말을 위한 것처럼 보였지만 암논을 죽인 후 압살롬은 다말을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 욕망과 욕심을 좋은 것이라고, 남을 위한 것이라고 포장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포장 안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 그 포장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해 먼저 오셨습니다.

3. 요나답 — 하나님 없는 지혜

이 사건에서 또 한 사람을 봐야 합니다. 요나답입니다. 그는 압살롬이 2년 동안 암논을 죽이려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지만 막지 않았습니다. 암논이 죽자 재빠르게 다윗에게 붙어 “제가 말한 대로 되지 않았습니까?”라며 자신의 통찰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답은 오늘 본문 이후 성경에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는 지혜는 —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우리 안에도 요나답이 있습니다. 알면서도 편한 쪽을 선택합니다. 강한 자 곁에서만 재능을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는 다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사 42:3). 하나님의 지혜는 약한 자를 향합니다. 그 지혜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4. 다윗 — 그리워하면서 머문 아버지

압살롬은 그술로 도망쳐 3년을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39절입니다.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간절하다’는 히브리어로 칼라입니다. 단순히 보고 싶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 84편 2절에서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라고 할 때 쓰인 바로 그 단어입니다. 마음이 완전히 소진될 만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살인자 아들을. 도망간 아들을. 자격 없는 아들을.

그런데 왜 다윗은 직접 가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밧세바 사건, 우리아의 죽음. 그 죄가 다윗을 침묵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음은 칼라였지만 — 그 마음이 발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사람 아버지의 한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었지만 — 그것은 불완전한 그림자였습니다.

5. 동쪽으로 — 그리고 서쪽에서 오신 분

압살롬이 도망간 그술은 예루살렘 북동쪽, 약 100km 떨어진 곳입니다. 동쪽입니다. 이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보면 죄 지은 사람은 계속 동쪽으로 갔습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 동쪽으로,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나 동쪽으로, 바벨탑 인류가 동방으로, 롯이 동쪽 소돔으로. 동쪽은 성경에서 일관되게 하나님의 임재에서 멀어지는 방향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죄를 짓고 동쪽으로 갑니다. 편한 곳, 익숙한 곳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는 점점 멀어집니다. 예배와 멀어지고, 말씀과 멀어지고, 기도와 멀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다윗은 그리워하면서 머물렀지만 — 하나님은 오셨습니다. 아담이 쫓겨날 때 가죽옷을 입혀주셨고, 가인이 떠날 때 표를 주어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 1:14). 동쪽으로 도망친 모든 압살롬을 향해 서쪽에서 동쪽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거룩한 곳에서 죄 있는 자리로 오셨습니다. 다윗의 칼라가 — 마침내 발이 되었습니다.

6. 십자가 — 내 자리에 서신 분

그런데 오신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죄는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대신 서셨습니다. 압살롬의 자리에, 요나답의 자리에, 그리고 나의 자리에. 채찍을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서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압살롬의 죄 값이 다 치러졌습니다. 요나답의 침묵의 값이 다 치러졌습니다. 동쪽으로 도망친 나의 죄 값이 다 치러졌습니다. 서쪽에서 오신 분이 동쪽 끝에서 십자가를 세우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의 동쪽을 서쪽으로 바꿉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혹시 아직도 동쪽으로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이미 그 자리로 달려오셨습니다. 이제 동쪽에서 서쪽으로 — 방향을 돌리십시오. 숨어 있던 자리에서 나오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7. 적용

첫째, 내 안의 압살롬을 점검하십시오.

내 욕망을 정의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분노를 당연한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번 한 주, 조용히 하나님 앞에 앉아 내 마음의 포장을 하나씩 벗겨보십시오. 그 정직한 자리에서 — 예수님을 만납니다.

둘째, 동쪽으로 향하는 발을 멈추십시오.

죄는 우리를 익숙하고 편한 곳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그 방향은 아버지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입니다. 예배와 멀어지고, 말씀과 멀어지고, 공동체와 멀어지고 있다면 — 지금 동쪽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 매일 아침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아버지, 나는 동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돌아옵니다.”

셋째, 십자가를 기억하십시오.

서쪽에서 오신 분이 동쪽 끝에서 십자가를 세우셨습니다. 내 죄 값은 이미 다 치러졌습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됩니다. 이번 한 주, 동쪽으로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 이미 그 자리에 서셨습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