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람은 있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집에 들어가면 아내와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 모두에게 말을 했는데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 더 크게 말했지만 여전히 조용했습니다. 결국 “나는 도대체 누구랑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라고 혼잣말을 했더니, 그제서야 여기저기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웃픈 이야기입니다만 — 사실 이게 우리 시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요즘은 SNS도 있고 사람을 만날 기회도 많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 외롭다고들 합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대화를 해도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 정말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관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 관계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 사람은 너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사무엘하 13장에 그런 여자가 한 명 등장합니다. 다말입니다. 다윗 왕의 딸이었고, 압살롬의 누이였습니다. 주변에 가족이 있었고, 왕이 있었고, 오빠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말 주변에는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암논입니다. 그는 다말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왜곡된 사랑은 상대방을 인격으로 보지 않습니다. 대상으로만 봅니다. 암논은 다말을 범한 직후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고 했습니다. 욕망이 채워지자마자 혐오로 뒤집혔습니다.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욕망이었습니다. 사랑이라 불렀지만 — 왜곡된 사랑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요나답입니다. 그는 히브리어로 하캄(חָכָם),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혜는 암논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쓰였습니다. 요나답의 치밀한 계략 어디에도 다말은 인격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지혜는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닙니다.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짓밟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약한 자를 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지혜는 — 강한 자의 편에 서서 약한 자를 밟고 올라섭니다. 지혜로웠지만 — 하나님 없는 지혜였습니다.
세 번째는 다윗입니다. 그는 왕이었고 다말의 아버지였습니다.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했습니다. 노하는 것 자체는 옳습니다.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 그게 전부였습니다. 암논을 책망하지 않았고, 다말에게 달려가지도 않았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분노만 기록되어 있고 행동은 없습니다. 다윗 자신의 죄가 그의 권력을 마비시켰습니다. 12장의 밧세바 사건이 그를 침묵하게 만들었습니다. 죄는 우리를 침묵하게 만들고, 있어야 할 자리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권력이 있었지만 — 선택적 권력이었습니다.
네 번째는 압살롬입니다. 다말의 친오빠였습니다. 그가 다가왔을 때 다말은 마음이 놓였을 겁니다. ‘드디어 누군가가 왔다. 이제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왔다.’ 그런데 압살롬이 한 말은 “잠잠하라”였습니다. 위로가 아니라 입을 막는 말이었습니다. 압살롬은 2년 후 암논을 죽였습니다. 정의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암논을 죽인 후 압살롬은 다말을 찾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다말이 아니라 자신의 분노와 야망을 위한 정의였습니다. 정의를 세우는 것 같았지만 — 왜곡된 정의였습니다.
그렇게 다말만 남았습니다. 재를 뒤집어쓴 채로. 찢긴 옷을 입은 채로.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다말은 이 모든 상황에서 가장 옳은 말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저항했습니다. 애원했습니다.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다말의 영혼은 히브리어로 솨맘(שָׁמַם) — 성읍이 무너져 황무지가 된 것처럼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 성경은 다말의 이름을 기록했습니다. 다말의 말을, 울음을, 저항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했습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것 같았던 그 자리에서 —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말의 이름을 아셨고, 다말의 울음을 들으셨고, 다말의 자리를 보고 계셨습니다.
이제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암논은 왜곡된 사랑으로 다말을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 요나답의 지혜는 강자의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약자의 자리를 향하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사 42:3). 다윗은 알면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알면서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압살롬의 정의는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말이, 우리가 서 있어야 할 황폐한 자리에 대신 서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
왜곡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지혜가 아닙니다. 선택적 권력이 아닙니다. 왜곡된 정의가 아닙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자리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그 자리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솨맘이었던 그 자리가 — 예수님으로 인해 더 이상 폐허가 아닙니다.
오늘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다말처럼 느끼시는 분이 계십니까?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것 같은 분이 계십니까? 옳은 말을 했는데 아무도 듣지 않았던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은 그 세미한 음성을 들으십니다. 그 말씀 앞에 나오십시오.
그리고 우리 곁의 다말에게 말을 건네십시오. “요즘 어떠세요?” 한 마디가 누군가의 솨맘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다말에게 말을 거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말을 거신 것처럼.
이번 주 적용입니다.
1. [말 걸기: Speaking Up]
“나는 지금 내 곁의 다말에게 말을 걸고 있는가, 침묵하고 있는가?”
2. [점검하기: Examining Myself]
“나는 지금 암논인가, 요나답인가, 다윗인가, 압살롬인가?”
3. [나아가기: Coming to Him]
“나는 지금 다말의 자리에서 혼자 황폐해져 가고 있는가, 예수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한 주 동안 이렇게 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