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11 칼럼
사진: Unsplash의Caroline Selfors

제목 : 어깨를 내어드릴 때 은혜가 풍성해집니다

1. 들어가는 말: 권한을 드렸는가?

여러분, 한 회사에 회사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내부에는 적임자가 없어 외부에서 유능한 전문가를 큰 비용을 들여 스카우트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프로젝트의 전권을 드릴 테니, 꼭 성공시켜 주십시오.”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자 사장이 사사건건 개입하며 자기 방식대로만 하라고 고집을 부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전문가를 모셔온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스포츠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승을 위해 최고의 선수를 영입했다면, 그 선수가 마음껏 역량을 발휘하도록 판을 깔아줘야 합니다. 귀하게 영입해 놓고 정작 선수의 손발을 묶어버린다면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모셔오려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다윗은 앞서 말씀드린 사장이나 감독과 같은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궤를 모셔오면서도, 정작 그 주도권은 하나님께 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왜 하나님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와야 했는지, 그리고 다윗이 범한 치명적인 실수는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나아가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하는지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2. 언약궤를 옮기려는 다윗의 중심

지난 시간까지 살펴본 다윗과 이스라엘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보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은 승리를 주셨습니다. 이대로만 살면 탄탄대로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굳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려고 합니다. 왜일까요?

언약궤는 출애굽기부터 이스라엘의 중심이었습니다. 광야를 지날 때 늘 진영의 가장 앞에 있었고, 요단강을 건널 때도 제사장들이 멘 언약궤가 강물에 닿자 강이 갈라졌습니다. 언약궤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고, 승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이 중요한 궤가 성막이 아닌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옵니다. 과거 블레셋에게 뺏겼다 돌아온 뒤로, 사무엘 시대를 지나 사울 왕 시대까지 무려 70년에서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궤는 한 개인의 집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난 100년 가까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중심에 ‘말씀’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삶의 주인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안타까운 증거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왕이지만,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내 생각대로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 받는 왕이다!” 이것을 만천하에 보여주기 위해 궤를 나라의 심장부인 다윗 성으로 옮기려 한 것입니다.

3. 화려한 궤 수송단과 다윗의 과시

본문 1절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은 국가적인 대사(大事)입니다. 다윗은 정예 요원 3만 명을 동원합니다. 지금 우리 본당에 3만 명에서 아주 조금(?) 모자란 분들이 계신데요. 3만 명이면 서울시청 광장을 가득 메울 수 있는 엄청난 인원입니다.

하지만 1절을 깊이 묵상해보면 묘한 부분이 있습니다. 궤 하나를 옮기는데 3만 명은 너무 많습니다. 게다가 다윗은 당대 최고의 악기들을 총동원합니다. 특히 ‘양금’이라는 악기는 성경 전체에서 딱 이곳에만 등장하는 희귀하고 특별한 악기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공을 들여 ‘최고급’으로 준비했는지 보여줍니다.

지금 분위기를 느껴보십시오. 3만 명의 환호성, 웅장한 오케스트라, 화려한 행렬… 마치 뜨거운 부흥회 현장 같습니다. 누가 봐도 완벽한 예배, 성공적인 축제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렇게 화려하고 열정이 넘쳐 보이는 바로 이 장면에, 다윗의 미묘한 ‘과시욕’과 치명적인 ‘실수’가 숨겨져 있습니다.

4. 다윗의 치명적인 잘못: 수레와 위치

세계에서 전사한 군인에 대해 최고의 예우를 갖추는 나라는 미국입니다. 유해가 돌아오는 ‘엄숙한 이송’ 과정에서 그들은 효율성을 따지지 않습니다. 운구차에 실을 때도, 국기를 접을 때도 숨 막힐 정도로 엄격한 절차를 따릅니다. 왜 그럴까요? ‘절차’가 무너지면 그 생명에 대한 ‘존중’도 무너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는 절차는 어떠해야겠습니까? 하나님은 민수기를 통해 분명한 매뉴얼을 주셨습니다. “고핫 자손은 성물을 만지지 말고, 채를 꿰어 어깨에 메라(민 4:15).” 이것이 하나님의 ‘존엄한 이송’ 방식입니다. 차가운 기계가 아닌, 사람의 체온이 닿는 어깨로, 거룩한 수고를 통해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새 수레’를 선택합니다. 나름 정성을 다해 준비한 새것이었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의 율법이 아닌 블레셋 이방인들의 효율적인 운송 방식이었습니다. 다윗은 가장 거룩한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 대신 세상의 편리함을 선택해 버린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위치’입니다. 광야 시절, 궤는 언제나 백성의 중심이나 맨 앞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맨 앞에 다윗과 악대들이 서고, 궤는 수레에 실려 뒤따라옵니다. 이 그림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가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을 이끌고 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높이는 듯했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이용해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5. 웃사의 죽음과 하나님의 돌파(파라츠)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뛰자 수레가 흔들립니다. 궤가 떨어지려 하자 웃사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궤를 붙듭니다. 인간적인 보호 본능이었으나, 그 손이 닿는 순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 웃사는 즉사합니다.
3만 명의 환호성과 악기 소리는 단 1초 만에 공포에 질린 침묵으로 바뀌었습니다.

8절은 이 상황을 ‘베레스 웃사’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쓰인 ‘베레스(파라츠)’는 “물을 흩음 같이 터뜨리다, 돌파하다”는 뜻입니다. 지난 5장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겸손히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파라츠’는 대적 블레셋을 향한 구원의 능력이었습니다(바알 브라심). 그러나 오늘 6장, 다윗이 하나님의 방법을 무시했을 때, 똑같은 하나님의 ‘파라츠’는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대하느냐, 욕망의 수단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그 능력은 우리를 살리기도 하고, 우리를 치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6. 다윗의 회복: 엘로힘에서 여호와로

이 사건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다윗은 처음에는 분노했지만, 곧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9절)
이 탄식 속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웃사 사건 이전까지 다윗은 줄곧 ‘하나님의 궤(Ark of Elohim)’라고 불렀습니다. ‘엘로힘’은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뜻합니다. 다윗은 궤를 ‘능력의 상징’으로만 봤던 것입니다.

그런데 철저한 실패 후 9절에서 비로소 ‘여호와의 궤(Ark of Yahweh)’라고 부릅니다.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 인격적인 관계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이제야 하나님을 ‘이용할 능력’이 아니라, ‘섬겨야 할 인격적인 왕’으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보내고 3개월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7. 말씀에 순종할 때 흐르는 은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교훈은 단순히 “말씀을 어기면 웃사처럼 벌 받는다”는 공포가 아닙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다윗이 누릴 수 있었던 그 풍성한 은혜가 차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야심 차게 준비한 ‘새 수레’가 오히려 하늘의 복이 내려오는 통로를 막아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순종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쭘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예비한 은혜를 네가 놓치지 않고 다 누렸으면 좋겠다”는 사랑 때문입니다. 불순종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들어오는 수도관을 우리 스스로 막아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가정과 일터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말씀대로 사는 것, 때로는 힘들고 미련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수도관을 여는 행위’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우리 삶에 막힘없이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8. 어깨(카테프)와 예수님(쉐켐)

오늘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원래 하나님의 궤는 채를 끼워 사람의 ‘어깨’로 메어야 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어깨’를 뜻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첫째는 ‘쉐켐(Shekhem)’입니다. 이는 목덜미 아래 등 쪽을 가리키며, 주로 무거운 짐이나 멍에, 통치권을 짊어질 때 씁니다.
둘째는 ‘카테프(Katef)’입니다. 이는 측면 어깨로, 고핫 자손이 궤를 멜 때 사용해야 했던 어깨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복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죄의 무거운 짐과 저주, 우리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죄의 짐을 당신의 ‘쉐켐(등)’에 짊어지셨습니다. 십자가라는 무거운 멍에를 주님이 대신 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는 기쁨으로 여호와의 궤를 우리의 ‘카테프(어깨)’에 메는 것입니다. 바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 때로는 어깨가 짓눌리듯 무겁습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편안한 ‘새 수레’를 쓰고 싶은 유혹도 듭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어깨(쉐켐)를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무거운 짐을 지셨기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거룩한 짐(카테프)을 져야 합니다. 우리가 편안함을 포기하고 어깨를 내어드릴 때, 다윗이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이 우리 삶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9. 적용 및 결단

이제 말씀을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해 봅시다.

첫째, ‘새 수레’를 버리고 ‘불편한 순종’을 선택합시다.
내 신앙생활에 효율성과 편리함만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를 드릴 때, 봉사를 할 때 “어떻게 하면 편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를 물으십시오. 조금 불편하더라도 말씀의 원칙을 지키는 ‘거룩한 미련함’을 회복합시다.

둘째, 하나님을 ‘이용’하지 말고 ‘경외’합시다.
다윗은 처음에 하나님을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한 ‘능력(엘로힘)’으로만 보았습니다. 혹시 우리도 나의 성공과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악세서리가 아니라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을 내 삶의 ‘수레’에 태워 끌고 다니려 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을 모시고 따르는 종의 자리를 되찾읍시다.

셋째, 예수님의 ‘쉐켐’을 기억하며 나의 ‘카테프’를 내어드립시다.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에서 구체적인 순종의 어깨를 내어주십시오. 자존심을 꺾고 먼저 사과하는 어깨, 힘든 동료의 짐을 나누어 지는 어깨,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하게 행하는 어깨가 되십시오. 그 순종의 어깨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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