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포기하지 않는 사랑과 싹트는 천국
1.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
설교를 준비하거나 듣다 보면, 익숙해서 오히려 그 깊은 의미를 놓치기 쉬운 본문들이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나 십계명이 그렇고,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씨 뿌리는 비유’가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비유를 들을 때, 씨앗이 뿌려진 밭의 종류, 즉 우리 마음의 상태에 초점을 맞춥니다. “길가, 돌밭, 가시밭 같은 마음을 버리고 좋은 밭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이죠. 물론 이는 중요한 교훈이지만, 이 비유가 담고 있는 더 깊은 비밀, 바로 천국에 관한 비밀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수많은 환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들자, 예수님은 집 밖으로 나와 갈릴리 호숫가에 앉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무리가 끊임없이 모여들자, 예수님은 배 위에 올라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시작된 배경입니다.
“씨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밭에, 더러는 가시덤불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이 비유의 의미를 해석해주십니다. 씨는 하나님 나라의 말씀, 즉 복음이고, 밭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길가는 말씀을 깨닫지 못해 악한 자에게 빼앗기는 마음, 돌밭은 기쁘게 받지만 환난에 넘어지는 마음, 가시덤불은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말씀을 막아 열매 맺지 못하는 마음, 그리고 좋은 땅은 말씀을 깨달아 열매를 맺는 마음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우리는 당연히 “좋은 밭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마음이 딱딱하면 복음이 뿌리내릴 수 없고, 헛된 욕심에 사로잡히면 말씀이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마음을 지키고 좋은 밭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단순히 우리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13장 전체가 ‘천국에 대한 비유’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들조차 이 비유의 의미를 몰랐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 비유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농부가 씨를 뿌릴 때 좋은 땅이 아닌 곳에 씨를 뿌리겠습니까? 당연히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는 좋은 땅에만 씨를 뿌리려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효율과 상식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마치 농부가 씨를 네 곳에 골고루 뿌린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당시 농사법이 오늘날처럼 밭의 경계가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농부가 길가와 돌밭, 가시밭에까지 씨를 뿌린 것은 지극히 비효율적인 행동입니다.
2. 효율을 넘어 사랑을 ‘낭비’하시는 하나님
세상은 철저히 효율과 능률을 추구합니다. 야구 결승전에서 감독은 가장 안타를 잘 치는 선수에게 대타 기회를 줄 것입니다. 농구 결승전의 마지막 3초, 감독은 가장 슛을 잘 넣는 선수에게 공을 패스하라고 지시할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가장 뛰어난 계약 전문가에게 중요한 거래를 맡깁니다. 우리 삶은 이처럼 계산적이고 효율적입니다. 우리는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는 것처럼,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비유’를 보십시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 얼마나 불효하고 비상식적인 행동입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그 요구를 들어줍니다. 아들은 그 재산을 낭비하고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그가 돌아오기를 매일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는 그를 알아보고 달려가서 안아줍니다. 그리고는 “내 아들이 돌아왔다”며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잔치를 벌입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효율을 따지거나 계산적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들을 향한 사랑을 아낌없이 부어주었을 뿐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이 아버지를 ‘탕부 하나님’이라 칭합니다. 여기서 ‘탕부’는 재산을 낭비한다는 뜻이지만, 하나님의 ‘낭비’는 바로 우리를 향한 끝없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낭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가 보기에 씨는 좋은 땅에만 뿌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길가와 돌밭, 가시밭에도 씨가 뿌려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가치관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조건을 보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이미 타락했고, 썩은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기준, 즉 공의와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처럼 효율만 따지셨다면, 우리 중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아마 아무도 구원을 자신할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는 원래 좋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딱딱한 길가였고, 돌이 많은 땅이었으며, 가시덤불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아무리 말씀이 뿌려져도 열매 맺을 수 없는 땅이었죠.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길가 같던 우리 마음에, 돌밭 같던 우리 마음에, 세상의 염려와 걱정에 사로잡힌 우리 마음에 끊임없이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조금씩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예배에 나오고, 말씀이 들리기 시작했으며,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헌금하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자 애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조금씩 열매를 맺게 된 것은 효율을 따지지 않고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씨를 뿌려주신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천국은 바로 이처럼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3. 환영받지 못하지만 확장되는 천국
예수님은 씨앗이 네 곳에 뿌려졌지만, 오직 한 곳에서만 열매가 맺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복음이 전파되더라도 많은 사람이 그것을 믿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환영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초대교회는 끊임없는 핍박과 이단의 미혹 속에서도 성장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잃은 이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핍박 속에서도 계속해서 확장되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주보와 전도 물품을 수만 개씩 나누어 주어도, 그 결과는 미미해 보일 수 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주보를 볼 때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때에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욱 어렵게 느껴집니다. 우리의 수고가 헛되이 낭비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놀라운 약속을 합니다. 세 곳에서는 아무 열매가 없었지만,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우리의 작은 기도와 수고가 헛되지 않으며, 비록 당장은 미약해 보일지라도 교회는 계속 성장하고 천국은 확장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4. 내 마음의 밭을 준비하는 우리의 책임
1970년대 프린스턴 대학에서 진행된 ‘착한 사마리아인 실험’은 우리 행동이 도덕적 신념보다 ‘상황’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설교를 준비했던 학생들보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그룹의 학생들이 쓰러진 사람을 더 많이 도왔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과 마음 상태에 따라 말씀이 달리 들릴 수 있습니다. 지친 마음으로 예배에 오면 말씀이 잘 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지만, 성경은 동시에 우리의 마음 준비에도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마음을 지켜 좋은 땅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가정이나 직장, 친구를 만날 때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주일 예배에 올 때 우리의 마음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좋은 땅이 아닌 곳에도 씨를 뿌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변 사람들에게 꾸준히 사랑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딱딱해 보이더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을 때, 그들은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예배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을 낭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 마음을 좋은 땅으로 가꾸고, 주변에 끊임없이 사랑의 씨앗을 뿌리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