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부활이 필요없는 세상에 부활을 외치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복된 주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조금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과연 이 세상은 더 이상 ‘부활’을 필요로 할까요?
1. 이 세상은 더 이상 부활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저 멀리 호주에서는 한 의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법적 논란 끝에 불법으로 결론 나긴 했지만,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받던 한 여성이 실제로 이 기계를 사용했다는 소식은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인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통제하려는 시도, 이는 부활을 통한 영원한 생명보다 현재의 고통을 끝내는 것에 초점을 맞춘 모습입니다.
한편, 어렵고 각박해진 세상살이에 우리의 일상은 너무나 바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니 밤늦게까지 “먹고 살기 바쁜데, 죽음이나 부활 같은 이야기를 생각할 여유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반문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당장 눈앞의 현실에 매몰되어 영원한 것에 대한 관심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직 가치관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우리의 자녀들이 보고 즐기는 영화나 웹툰을 보면, 놀랍게도 ‘죽음’이 참 가볍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공이 죽어도 다른 차원에서 다시 나타나거나,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 죽기 전의 주인공을 데려오기도 합니다. 멀티버스라는 개념 속에서 ‘다른 지구의 나’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내가 사라져도 괜찮다는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이런 미디어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죽음과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너무나 멀게 느껴집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세상의 분위기가 교회 안에도 스며든 것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말로는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오늘 내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고백하지만, 그 삶의 모습 속에서 죽음 이후의 삶이나 예수님의 재림, 그리고 부활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나 깊은 관심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듯 보일 때가 있습니다.
바울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도 이와 비슷한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부활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부활에 대해 어떤 무관심이나 오해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부활 신앙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부활에 대한 오해들을 몇 가지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는 주로 세상적인 철학이나 사고방식의 영향이었을 것입니다. 영혼의 불멸은 믿을지 몰라도, 육체의 죽음 이후의 삶이나 부활은 믿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언젠가 암으로 힘들어하시던 분께 복음을 전했을 때,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던 경험처럼, 죽음 그 자체를 끝으로 여기는 시각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합니다.
둘째, 영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이원론의 영향입니다. 이원론은 육체로부터 벗어나 영혼만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육체의 부활은 오히려 불필요하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육체의 부활을 말씀하는데도 말입니다.
셋째,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영적인 부활로 충분하다. 미래의 육체적 부활은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으니, 더 이상의 부활은 없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부활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오해였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로 부활을 부인하거나 오해하는 시각들이 고린도교회 안에 존재했습니다.
2. 만약 정말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이 없다’는 주장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논리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설명합니다. 12절 이하에서 그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첫째,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도 없는 것이 됩니다(13절). 인간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마저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동떨어진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굳건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바울과 모든 성도들이 전하는 복음은 완전히 거짓이 됩니다(14절). 또한 성도들이 그 복음을 믿는 ‘믿음’ 역시 아무런 효력이 없는 헛것이 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근거 자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성도들의 죄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17절).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죄 값을 완전히 지불했음을 증명하는 하나님의 인치심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죄와 사망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도 증명되지 않으며, 우리는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넷째, 세 번째 이유와 연결하여, 하나님을 믿다가 먼저 죽은 모든 성도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망한’ 것이 됩니다(18절). 그들이 믿고 소망했던 영원한 생명과 천국은 환상에 불과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19절). 영생을 소망하고 천국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말씀에 순종하여 인내하고, 손해 보고, 양보하며 살았던 모든 삶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면, 그렇게 고난을 자처하며 살 이유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이 없다’는 주장은 기독교 자체를 뿌리째 흔들어 없애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기독교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3.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을 말해야 합니다. 부활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15장 1절에서 “너희에게 전한 복음 안에 부활이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3-4절에서 복음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첫째,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3절). 예수님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나 어쩔 수 없는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고, 구약 성경이 예언한 대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둘째, 복음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신 것입니다(4절 상). 예수님의 죽음을 부정하거나, 예수님이 실제 육체를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는 이단적인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인간의 몸을 입고 죽으셨으며, 그 시신이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셨음’을 명확히 증언합니다. 이는 그분의 죽음이 실제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셋째,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4절 하). 이것이 복음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기 위해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갔다거나, 기절했다가 살아났다는 등 수많은 거짓 가설들이 난무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성경의 예언대로, 역사적인 시점인 ‘사흘 만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분명히 선포합니다.
넷째,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게바를 비롯한 수많은 증인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5-8절). 부활은 환상이 아니라 실제 사건이며, 살아있는 목격자들이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백 명이 넘는 증인 중 다수가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까지 살아있었다는 것은, 그 누구라도 가서 그들에게 직접 부활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각각 ‘성경대로’라는 표현이 붙어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예언되고 준비되어 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성취인 것입니다. 복음을 더 간략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복음이라는 동전의 앞면이 예수님의 죽음이라면, 뒷면은 부활입니다. 부활을 빼놓고는 복음을 제대로 설명할 수도, 전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부활에는 명확한 순서가 있습니다(20-23절). 가장 먼저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이 부활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 다시 오시는 그 순간까지 믿음 안에서 살고 있는 성도들이 변화되어 부활에 참여할 것입니다.
4. 부활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렇다면 이처럼 놀라운 부활의 진리를 알고 믿는 우리는 오늘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15장 3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이 정말 물리적으로 날마다 죽었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죄된 본성인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의미입니다.
즉,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여전히 내 속에 남아 있어서 순간마다 죄의 길로 이끌려는 죄된 본성(옛 자아)에 대하여는 ‘죽고’, 나를 구원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들고 말씀을 기준 삼아 ‘의에 대하여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죄를 중심으로, 세상을 중심으로 살던 옛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사는 새로운 삶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 생명의 능력으로 옛 자아와 날마다 싸워 이기는 영적 전투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부활주일이면서 동시에 세례식이 있습니다. 세례는 바로 이 ‘날마다 죽는 삶’, 즉 내가 죄와 세상에 대하여 죽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났음을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자리입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었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예식입니다.
오늘 세례받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이 세례를 통해 옛 자아와 세상에 대하여 분명히 죽고 예수님 안에서 새 생명으로 잘 살아나시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예수님과 연합한 자로서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날마다 죄와 싸워 이기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은 부활이 필요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날마다 나의 죄된 본성에게는 ‘죽고’, 예수님 안에서 의의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