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3.2 칼럼
두 개의 길에서 만나는 하나님

고속도로를 운전하다 보면 저를 당황하게 만드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갈림길입니다. 보통 갈림길은 이정표를 보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죠. 내비게이션도 적당한 때에 “우회전하세요”라며 알려줘서 당황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가끔 갈림길인데도 결국 다시 합쳐지는 길이 있잖습니까? 문제는 내비게이션이 이런 갈림길에선 늦게 안내를 해준다는 거죠. 그러면 저는 “어?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하며 당황합니다. 내비게이션 소리가 없으니 그냥 느낌으로 핸들을 꺾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만약 잘못된 길로 가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듭니다. 하지만 조금 가다 보면 “아, 이 길은 어차피 합쳐지는 길이구나” 하고 안심하게 됩니다.

성경은 성도의 삶을 길에 비유합니다. 우리도 지금 인생이라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길에는 두 가지가 늘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때에 맞춰 사람을 보내주시고 상황이 잘 풀리는 평안한 길이고, 또 하나는 답답하고 힘든 고난의 길입니다. 우리 삶에는 항상 이 두 길이 공존하죠. 이런 길을 걸을 때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다윗의 이야기를 볼까요? 사무엘상 23장에서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일라 주민들을 구해줬는데도, 그들은 다윗을 배신하고 사울에게 그의 위치를 알려줬습니다. 정말 외롭고 힘든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요나단이 나타납니다. 사울은 그토록 애를 썼지만 다윗을 찾지 못했는데, 요나단은 어떻게 된 일인지 쉽게 다윗을 찾아냈습니다. 이건 분명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이었죠.

요나단은 다윗에게 와서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첫째, “너는 왕이 될 거야. 내가 그걸 알아”라고 용기를 북돋워줬습니다. 둘째, “사울 왕도 네가 이스라엘의 다음 왕이 될 걸 알고 있어”라고 다윗의 미래를 확신시켜 줬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언약을 맺었습니다. 전에 했던 약속, 서로의 후손을 돕겠다는 그 언약을 새롭게 다진 거죠.

요나단의 등장은 정말 뜬금없었죠. 하지만 다윗에겐 큰 힘이 됐을 겁니다. 성경엔 이런 뜬금없는 도움의 손길이 또 있습니다. 출애굽기 1장을 보면, 바로는 이스라엘 여자들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했었죠. 모세의 부모는 아들을 몰래 숨겼다가 더 이상 키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 강 갈대 사이에 띄웠습니다. 그때 바로의 딸이 갑자기 나타나 모세를 구해줬습니다. 바로의 딸이라니, 상상도 못 했던 인물이었죠.

여호수아 2장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정탐하려고 두 사람을 보냈는데, 그들이 금방 들키고 말았습니다. 쫓기던 정탐꾼들이 기생 라합의 집으로 숨어들었죠. 이스라엘과 아무 상관없던 라합이 그들을 숨겨주고 구해줬습니다.

신약에서도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장을 짐승이나 매국노로 여겼습니다. 일상에서 그를 상대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있는 그 나무 아래를 지나가시다가 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 바울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 길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비추는 빛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때 뜬금없이 아나니아가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모두가 피하던 사울에게 찾아가 그의 눈을 뜨게 도와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인도하시는 첫 번째 길은 사람과 환경을 통해서였습니다. 도망 다니는 다윗에 비해 사울은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에게 잡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인도하시고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요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셨습니다. 요나단은 두려워하는 다윗을 위로하고 금방 떠났습니다.

우리 삶에도 원치 않는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건 내 죄 때문일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을 놀랍게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또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사람을 보내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도 이런 놀라운 일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아직 긴장의 끈을 놓치면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십 사람들이 사울에게 다윗의 위치를 알려줬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다윗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었습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사울은 다시 다윗을 쫓아갔습니다. 다윗도 사울이 쫓아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다시 도망갔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윗은 사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인도하시는 두 번째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아마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모든 사람은 고난을 피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고난이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셨을까요? 물론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모두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다윗이 고난 가운데 지은 시편을 보면 그가 어떻게 했는지,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시편 54편 2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다윗은 고난 가운데 절실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도 고난의 길을 갈 때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습니다.
시편 57편 1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프소서 내게 은혜를 베프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우리가 고난의 길을 갈 때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기를 힘썼습니다.
시편 63편 1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목이 타서 괴로울 때 물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갈망해야 했습니다.

왜 우리에게 고난이 있어야 했을까요? 만약 다윗이 도망자 생활을 하면서 배불리 먹고, 여유롭게 지내고,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면,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는 무엇을 통해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아마 다윗도 그 고난의 길을 걸을 때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고난의 길에서 잘 견뎠습니다. 열매를 맺었습니다. 방금 읽었던 시편에 다윗이 맺은 열매가 나왔습니다.

시편 54편 7절입니다.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다윗은 고난의 길을 가다가 삶의 문제와 어려움이 해결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시편 57편 9절입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다윗은 고난 속에서 결국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시편 63편 11절입니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다윗은 고난이 끝난 뒤 즐거워했고, 만난 하나님을 자랑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설교를 처음 시작할 때 하나님이 성도를 인도하시는 “두 개의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길은 우리 모두가 원하는 좋은 길이었습니다. 일이 잘 풀리고 형통한 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도와주시는 길이었습니다. 이 길을 잘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왜 이 길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지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고난의 길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형통하게 인도받는 길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복을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하지만 고난의 길에서도 하나님을 만나 열매 맺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두 길 모두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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