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윗은 그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헤렛 수풀에 있었습니다. 그때, 블레셋이 그일라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다윗에게 들려왔습니다. 다윗으로서는 매우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도망자 신세입니다. 그런 그가 블레셋과 싸워 승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다윗이 블레셋과 싸우면 그의 위치가 사울에게 노출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때 다윗은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할지 여쭙습니다. 아둘람 이후 다윗은 변했습니다. 그는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승리를 약속하셨고, 다윗은 두려워하는 부하들을 이끌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결국, 그일라 주민들을 구해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그의 위치가 사울에게 알려졌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그일라 성읍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공격하려 합니다. 다윗이 광야나 굴에 숨어 있었다면 찾기가 어려웠겠지만, 성읍 안에 있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고민했습니다. ‘사울이 정말로 공격하러 올까?’, ‘그일라 주민들은 나를 지켜줄까, 아니면 배신할까?’ 그는 이 질문을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공격하러 올 것이고, 그일라 주민들은 너를 배신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다윗은 눈물을 머금고 그일라를 떠나야 했습니다.
다윗은 왜 그일라 주민을 구했을까?
또, 그들이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알고도 왜 아무 말 없이 떠났을까?
아둘람 이후, 다윗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름받았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즉 정체성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정체성을 깨달은 사람은 그에 맞는 행동을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맡기신 왕의 역할을 이해했습니다. 왕은 소외된 자들을 돌보고 보호해야 합니다. 비록 그일라 주민들이 배신할지라도, 그들도 이스라엘 백성이며, 언젠가 자신이 다스릴 백성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원망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묵묵히 그곳을 떠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 왕으로서의 길을 배워가고 있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윗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윗 곁에는 제사장 아비아달이 있었고, 선지자 갓이 그의 길을 인도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요, 참된 선지자이며, 영원한 왕이라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다윗이 소외된 자들을 구한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에게 자유와 회복을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마지막을 보면, 다윗은 다시 요새와 십 광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일라 주민을 구했던 다윗.
소외된 자들을 도왔던 다윗.
그런데 정작 그는 여전히 도망자 신세입니다.
혹시 다윗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사울 왕은 저렇게 편히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힘든 삶을 사는 걸까?”
우리도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데, 왜 내 삶은 이렇게 풀리지 않을까?”
“나는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데, 왜 답답한 시간을 보내야 할까?”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내가 더 힘든 것 같은데, 왜 이런 걸까?”
결국, 이 질문들은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가?”
“하나님은 공평하십니까?”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신다”(삼상 16:7)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이 말씀에는 “사람은 서로 다르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도 중에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유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이 받은 것’만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공평함을 판단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신다”는 말씀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은 사람의 기준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의 기준으로 구원을 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돈을 많이 버는 사람,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 지식이 뛰어나 교회 일을 탁월하게 잘하는 사람, 전도를 많이 하는 사람만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히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송명희 시인은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녀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갖고 있지 않은 것 가졌으니
나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으며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나 남이 없는 것을 갖게 하셨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평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과는 다른, 영원한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 고백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불공평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공평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1. 세상의 평가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세상은 세상의 기준으로 우리를 평가합니다.
물론 우리는 삶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준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정체성과 가치를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2. 힘들 때 하나님께 솔직하게 기도하십시오.
살다 보면 누구나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경험합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도 그랬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기도할 때는 솔직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돈이 없습니다.”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이렇게 어렵습니까?”
“하나님, 저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십시오.”
시편을 보면, 다윗은 도망자 생활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께 그대로 아뢰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울면서 떼쓰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다윗의 기도는 눈물과 아픔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다윗의 눈물을 닦아 주셨고, 회복시키셨고, 힘을 주셨으며, 결국 그의 상황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기도 가운데 이러한 놀라운 경험을 하시길 축복합니다.
3.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기준을 붙들고, 세상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으며, 솔직한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런 여러분의 발걸음 위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넘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