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일 칼럼
사진: Unsplash의Sincerely Media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온전하게 하신 후,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한 집에 들어가셨을 때, 예수님이 집에 계신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그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왔습니다. 집 안은 사람들이 가득 차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기에,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먼저 “네 죄가 사함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서기관들은 속으로 “신성 모독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중풍병자를 고쳐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죄를 사하실 권세가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첫 번째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믿는 만큼 행동하며, 믿음에는 항상 순종이 따릅니다.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면, 그 믿음에 걸맞은 삶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본문 9절을 보면, 예수님이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길을 지나시다 마태를 보시고, 단순히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마태의 집에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너희 선생은 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느냐?“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의 비판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라야 필요하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인’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의로워 보였지만, 실제로는 속이 다르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죄를 용서하러 오신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사람은 두 번째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마태처럼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태처럼 직장을 포기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직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과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죄가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새로운 목적을 가지고 자유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이 말씀에서 새 포도주는 예수님이 가져오신 새 언약과 복음을 뜻하며, 낡은 가죽부대는 유대교의 전통과 율법주의를 상징합니다. 새 부대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세 번째로 삶의 기준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복음에 맞춰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세 가지를 해야 합니다.
1.예수님이 죄를 사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2.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삶의 기준을 예수님께로 바꿔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삶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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