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불완전한 동기, 완전한 식탁
1. 승리한 왕의 시선이 향한 곳
지난주, 우리는 다윗이 동서남북 사방의 적들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하나님께서 그가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신 전적인 은혜의 결과였다. 외부의 적들이 모두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오자, 왕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내부’로 향한다. 밖이 평안해졌으니 이제 안을 단속해야 할 차례인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사울 왕가를 지지하는 잔존 세력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보통의 왕들이라면 이 잠재적인 ‘내부의 적’을 어떻게 처리할까?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단행하여 후환을 없애는 것이 세상의 상식이며, 승자의 법칙이다. 과연 다윗은 이 불안한 국내 정치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 나갈 것인가? 다윗의 선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영적 파문을 던진다.
2. 시바의 계산과 다윗의 언약
모든 정복 전쟁이 끝나고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어느 날, 다윗 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울의 집에… 아직 남은 사람이 있느냐?”
순간 왕궁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신하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 올 것이 왔구나. 드디어 다윗이 사울 왕가의 씨를 말리려나 보다.’ 모두가 숙청의 피바람을 예감했다. 하지만 다윗의 입에서는 서릿발 같은 처형 명령 대신, 전혀 예상치 못한 따뜻한 고백이 흘러나왔다.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리라.”
다윗은 왜 원수의 집안에게 은총을 말했을까? 그의 기억은 수십 년 전, 생사의 기로에 섰던 어느 들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울 왕의 칼날이 자신의 목을 겨누던 그 절박했던 시절, 요나단은 다윗을 붙들고 눈물로 맹세했다. 요나단은 사무엘상 20장 15절의 언약을 남겼다.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여기서 요나단이 부탁한 ‘인자함’, 그리고 오늘 다윗이 말하는 ‘은총’. 이 두 단어는 히브리어로 똑같은 ‘헤세드(Hesed)’다. 다윗의 귓가에는 그날의 피 맺힌 언약이 생생하게 되살아난 것이다.
다윗은 즉시 수소문했고, 사울 집안의 옛 종 ‘시바’가 왕 앞으로 불려왔다. 다윗이 남은 자를 묻자, 시바는 묘한 표정으로 계산된 대답을 내놓았다.
“왕이여, 요나단의 아들이 하나 있긴 합니다만… 그는 두 다리를 다 저는 자입니다.”
이 말속에는 시바의 교활한 계산이 숨어 있다. “왕이시여, 안심하십시오. 그는 걷지도 못하는 불구자입니다. 감히 반역을 꿈꿀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시바는 므비보셋의 장애를 강조함으로 왕을 안심시키는 동시에, 은연중에 주인의 아들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시바에게는 숨길 수 없는 욕망이 있었다. 그는 종의 신분이었으나 아들이 15명이요, 종이 20명이나 되었다. 주인이 몰락한 틈을 타 사울의 막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진짜 주인’ 므비보셋의 등장은 자신의 왕국이 무너지는 재앙과도 같았다. 하지만 다윗은 시바의 보고에도, 므비보셋의 장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윗의 눈에는 ‘불구자’가 아닌 ‘요나단의 아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당장 그를 데려오라.” 왕의 이 한마디가 로드발 황무지에 숨어 있던 므비보셋의 인생을 바꾸기 시작했다.
3. 죽은 개가 왕의 식탁에 앉다
므비보셋이 숨어 지내던 곳은 요단 강 동쪽, 길르앗 지역의 ‘마길의 집’이었다. 길르앗은 전통적으로 사울 왕가를 향한 충성심이 깊은 곳이다. 므비보셋은 매일매일이 살얼음판이었을 것이다. 신분이 탄로 나는 순간 자신뿐만 아니라 숨겨준 이들까지 몰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집 밖에서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왕의 군사들이 들이닥쳤다. “므비보셋이 어디 있느냐? 왕의 명령이다!”
므비보셋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을 것이다. ‘이제 나는 죽었구나.’ 그는 저항 한 번 못하고 다윗의 면전으로 끌려왔다.
화려한 왕궁, 높이 솟은 보좌 앞에 초라한 행색의 므비보셋이 섰다. 그는 공포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그는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다윗 앞에 엎드렸다. 아니, 다리에 힘이 풀려 지팡이를 놓치고 바닥으로 “쿵” 하고 무너지듯 쓰러졌다.
다윗이 입을 열었다. “무서워하지 말라.”
처형 명령을 기다리던 그에게 들려온 첫 마디였다. 다윗은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반드시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이것이 다윗이 그를 부른 진짜 목적이었다. 복수가 아닌,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한 성실한 사랑이었다. 다윗은 사울의 모든 밭을 도로 주겠다고 선언했다. 단순히 목숨만 부지해 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겼던 왕가의 전 재산을 회복시켜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이 감당할 수 없는 은혜 앞에서 므비보셋은 오열하며 고백한다.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죽은 개(Dead dog).’ 가장 비천하고 쓸모없는 존재를 뜻하는 말이다. 다윗은 이 고백을 들으며 사울에게 쫓기던 시절 자신을 ‘죽은 개’라 칭했던 옛 모습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를 ‘죽은 개’라 불렀으나, 왕은 그를 ‘아들’이라 불렀다. 이것이 로드발의 도망자에게 임한 놀라운 구원이었다.
4. 로드발을 떠나 왕의 식탁으로
이 이야기는 단순히 다윗 왕의 미담이 아니다. 바로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푼 유일한 이유는 므비보셋의 자격 때문이 아니라, 오직 ‘요나단과 맺은 언약’ 때문이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깨뜨려 버린 언약을 다시 잇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감내하셨고, 죄인인 우리를 살리는 ‘새 언약’이 되셨다.
므비보셋을 보라. 그는 두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고, ‘로드발(말씀이 없는 곳, 황무지)’에 숨어 살던 자였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 아니었는가? 우리 또한 영적인 장애를 가진 자들이었다.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죄의 황무지가 우리의 주소지였다. 죄의 무게에 눌려 결국 영원한 형벌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죽은 개’와 같은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 절망의 땅에 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므비보셋이 어디 있느냐?”
다윗이 그를 찾았듯,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우리를 로드발에서 끄집어내어 은혜의 성읍 예루살렘으로 옮기시고 선포하셨다.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5. 다윗의 정치적 계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잠시 멈추어 냉정하게 본문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성경 인물들의 행동이 ‘100% 순수할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다윗을 자세히 보면, 그의 행동 곳곳에 ‘노련한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첫째, 땅의 회복 문제다. 다윗이 사울의 밭을 돌려준 것은 파격적인 은혜처럼 보이지만, 율법(레위기 25장)에 따르면 각 지파의 땅은 영구히 팔 수 없으며 희년에는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즉, 다윗의 행동은 은혜인 동시에 율법에 따른 정당한 조치였다.
둘째, 거주지의 이동 문제다. 사울의 적통인 므비보셋이 지방에 머물며 반다윗 세력의 구심점이 된다면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다윗이 그를 예루살렘으로 부른 것은 초청인 동시에, 눈앞에 두고 관리하겠다는 ‘부드러운 연금’일 수 있다.
셋째, 아들 미가의 문제다. 훗날의 화근이 될 수도 있는 미가의 경제적 기반을 자신의 충신인 시바가 장악하게 만든 것 또한 다윗의 치밀함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은혜라더니 다 정치쇼였나?’ 도대체 우리는 이 복잡한 다윗의 내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6. 불완전한 순종도 주 안에서 열납된다
몇 년 전, 설교를 준비하며 내 안에 두 가지 마음이 싸우는 것을 보았다. ‘성도들이 은혜받았으면 좋겠다’는 거룩한 마음과, ‘설교 잘한다는 칭찬을 듣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엎드려 회개했다. “하나님, 목사가 되어서 제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그 후로 나는 늘 기도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여전히 내 마음은 100% 순수하지 않다. 예배 후 성도들의 칭찬을 들으면 어깨가 으쓱하고 기분이 좋다. 그렇다면 나는 자격 미달인가? 100% 순수해질 때까지 강단에서 내려와야 하는가?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한가? 오늘 예배의 자리에 100% ‘영과 진리’로만 무장해서 나오셨는가? 헌금할 때, 봉사할 때, 가정에서 가족을 사랑할 때, 단 1%의 계산도 없이 순전한가? 우리의 대답은 모두 “아니요”다. 우리는 여전히 죄성을 가진 연약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다윗을 보라. 그 역시 100% 온전하지 못했다. 그의 선행 뒤에는 정치적 계산과 인간적 욕심이 섞여 있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다윗을 보고 “너는 탈락이다”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가 완벽해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순종이 비록 얼룩지고 부족할지라도, 우리가 ‘언약(말씀)’을 붙들고 나아갈 때 그것을 기쁘게 받아주신다.
우리는 “내 마음이 섞여 있으니 봉사하지 않겠다”라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내 마음이 불완전하기에 더욱 주님을 의지하며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앙의 정수다. 우리의 예배와 봉사에 불순물이 섞여 있을지라도, 우리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할 때 그 모든 불완전함은 씻겨지고,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사가 된다.
만약 다윗이 “내 마음이 정치적 계산 없이 100% 순수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므비보셋을 돕겠다”고 했다면, 므비보셋은 로드발에서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7. 나가며
오늘 우리는 므비보셋을 통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고, 다윗을 통해 ‘인간의 불완전한 순종’을 보았다. 므비보셋은 스스로를 ‘죽은 개’라 불렀지만 왕은 그를 ‘아들’이라 불렀고, 다윗은 불완전한 왕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통해 구원의 그림을 완성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동기는 섞여 있고 의지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 하나를 보시고 우리를 왕의 식탁에 앉히셨다. 그러므로 나의 부족함을 핑계 삼아 로드발로 도망가지 말자. 내 마음이 100%가 아니라고 주저앉아 있지 말자.
내 감정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예배와 봉사의 자리를 지키라. 가정과 일터에서 100% 사랑스럽지 않아도 말씀에 의지하여 사랑을 실천하라. 그리고 세상에서 넘어질 때마다 사탄의 참소를 물리치고 외치라.
“나는 다리를 절지만, 왕의 식탁에 앉은 왕자다.”
이 거룩한 자존감을 가지고,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왕의 식탁보 아래로 들어오는 모든 성도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