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25 칼럼
2026.1.25 칼럼

1. 나무 블록과 아버지의 미소

첫째 아이가 네 살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아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저를 불렀습니다. “아빠, 아빠! 이리 와보세요. 제가 깜짝 선물을 준비했어요!” 무슨 일인가 싶어 아이가 놀던 방으로 갔더니, 아이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짜잔!” 하며 바닥을 가리켰습니다. 그곳에는 삐뚤빼뚤한 나무 블록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제가 아빠 집, 엄마 집, 찬이 집, 민이 집을 만들었어요!”

당시 막내는 태어나기 전이라 우리 네 식구를 위해 자그마한 집 네 채를 지어 선물한 것입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빠를 위해 집을 지어주겠다는 그 마음이 얼마나 기특하고 예쁜지, 저는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두고 한참을 행복해했습니다.

물론 냉정하게 보면 그 집은 집이 아닙니다. 비바람을 막아주지도 못하고, 그 안에 들어가 쉴 수도 없는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아빠인 저에게 그 ‘나무 블록 집’은 세상 어떤 호화로운 저택보다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그 안에 아이의 사랑과 마음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겠다고 나섭니다. 내 손으로 공로의 탑을 쌓고, 헌신의 집을 지어 하나님께 내밀며 뿌듯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 마음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 마음은 고맙다. 하지만 집은 네가 나에게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지어주는 것이란다.”

2. 백향목 궁의 다윗과 거니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인생의 정점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방 원수를 멸하시고, 그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셨습니다. 두로 왕 히람이 보내준 최고급 백향목으로 지어진 궁궐에서 다윗은 평안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백향목 특유의 은은한 향기 속에서 휴식을 취하던 어느 날, 다윗의 눈에 창밖 풍경이 들어왔습니다. 화려한 왕궁 한켠, 바람에 펄럭이는 낡고 초라한 텐트 하나. 바로 하나님의 궤가 모셔진 성막이었습니다.

순간 다윗의 마음에 ‘거룩한 민망함’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이토록 좋은 백향목 궁에 사는데,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궤는 저 초라한 휘장 가운데 있구나.”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불러 자신의 계획을 밝힙니다. 하나님을 위해 크고 웅장한 성전을 짓겠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기특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윗조차 인지하지 못한 미묘한 오해가 숨어 있었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왕들은 자신의 왕궁 터 안에 화려한 신전을 짓고, 그 안에 신을 모셔두었습니다. 신전은 왕의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자, 신을 한곳에 정착시켜 인간의 섬김을 받게 하는 장소였습니다. 다윗 역시 은연중에 하나님을 ‘모셔두어야 할 대상’, ‘내가 지어드린 집에 안락하게 앉아 계셔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날 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의 계획을 정중히,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친히 소개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삼하 7:6)

여기서 ‘다녔다’는 히브리어 단어 ‘할라크(Mithallēk)’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단순히 이동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리저리 부지런히 거닐다’, ‘동행하다’라는 역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어컨 나오는 시원한 신전에 앉아 인간이 바치는 제물을 기다리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걸을 때 가장 앞서 걸으셨습니다. 뜨거운 태양 볕 아래 구름기둥으로, 차가운 밤공기 속에 불기둥으로 임재하시며, 흙먼지 날리는 백성들의 삶의 현장 한가운데 텐트를 치고 함께 사셨습니다. 하나님은 ‘앉아 있는 신’이 아니라 ‘거니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할라크’의 은혜는 신약에 와서 절정을 이룹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거니심의 결정판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섬기려 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숫가를, 예루살렘의 거리를, 병자들과 세리들의 집을 부지런히 ‘거니시며’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건물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거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3. 주권자의 선언: “네가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다윗에게 두 가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첫째는 “네가 무소부재한 나를 가둘 집을 지을 수 있느냐?”는 것이고, 둘째는 “네가 나를 위하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너를 위하는 것이냐?”는 주체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8절을 통해 다윗의 과거를 소환하십니다.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주권자(나기드)’라는 칭호를 주십니다. 이는 왕(멜렉)과는 다른 개념으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 곧 ‘목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다윗아, 기억해라. 네가 잘나서 왕이 된 것이 아니다. 양 똥 냄새나던 그 들판에서 너를 ‘데려온(라카흐)’ 것은 나다. 네 앞에서 원수들을 끊어낸 것도 나고,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든 것도 나다. 네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준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행하였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저의 지난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다윗처럼 ‘내가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세우고, 무언가 대단한 헌신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의 ‘캐리어 시절’을 떠올리면 그런 교만은 눈 녹듯 사라집니다.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제 손에는 달랑 여행용 캐리어 하나뿐이었습니다. 잘 곳이 없어 친구 집에 신세를 져야 했고, 언제 나가야 할지 몰라 짐조차 풀지 못한 채 면접을 보러 다녔습니다. 좁은 고시원 방에서 미래를 걱정하며 잠 못 이루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기적처럼 신대원에 합격하게 하시고, 은혜로 사역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주셨고, 비록 대출은 있지만 짐을 풀고 쉴 수 있는 집도 주셨습니다. 제가 노력해서 얻은 전리품일까요? 아닙니다. 목동 다윗을 왕으로 만드신 하나님께서, 캐리어 하나 들고 떨던 저를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전적인 은혜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제가 예배드렸습니다. 헌금했습니다. 봉사했습니다”라고 말하며 하나님께 청구서를 내밀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섬김이 필요해서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자녀 삼으시고, 우리 인생을 책임지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거룩한 반전: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으리라”

오늘 본문의 하이라이트는 11절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집(Temple, 건물)’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한 반전을 선포하십니다.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House, 왕조)을 짓고.”

여기서 ‘집(바이트)’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바뀝니다. 다윗이 지으려던 것은 돌과 나무로 된 건물이지만, 하나님이 지어주시는 것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다윗의 가문’, 즉 ‘언약의 집’입니다.

이 약속은 8절의 ‘만군의 여호와’라는 호칭과 함께 선포됩니다. 마치 대통령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빠가 해줄게”라고 말하던 사적인 약속을 넘어, “본 대통령은 국가의 명운을 걸고 선포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무게감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통치자로서 다윗의 인생에 ‘결재 도장’을 찍으신 것입니다.

이 언약은 12절에서 “네 몸에서 날 씨를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는 약속으로 구체화됩니다. 일차적으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의미하지만, 역사적으로 다윗의 왕조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불탔고 왕조는 끊어졌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언약의 진정한 성취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건물’을 드리고 싶어 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한 생명의 계보’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5. 비 새는 고시원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말씀을 맺으며, 제 고시원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유난히 비가 많이 오던 어느 여름밤이었습니다. 자고 있는데 발등에 차가운 물방울이 ‘똑, 똑’ 떨어졌습니다. 불을 켜고 보니 천장은 멀쩡했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다시 누웠는데 또 물이 떨어집니다. 알고 보니 제 머리 쪽 천장에 빗물이 고였는데, 그쪽 벽지는 튼튼해서 물을 머금고 있다가, 벽지가 약한 발등 쪽으로 물이 흘러내려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주인에게 말했더니 위층에 있는 빈방을 내주었습니다. 제가 살던 방의 세 배나 되는 넓은 원룸이었습니다. 그 방에 들어선 순간, 과장을 조금 보태서 정말 ‘천국’ 같았습니다. 엘리베이터 없는 낡은 빌라를 떠나 아파트로 처음 이사 왔을 때도 그랬습니다. 더 넓고 안전한 집이 주는 평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집이 바뀌면 삶의 질이 바뀝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지으신 집에 사는 인생은 어떻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비 새는 고시원 같은 우리네 인생을 찾아오셔서, 빗물을 막아주시고 더 넓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시는 분이십니다.

설교 서두에 말씀드린 ‘나무 블록 집’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여전히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나무 블록 몇 개를 쌓아 올리고는 “하나님, 제가 멋진 집을 지었습니다!”라고 자랑합니다. 하나님은 그 모습이 귀여워 웃으시지만, 냉정하게 말해 그 장난감 집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진짜 집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 우리의 공로, 우리의 열심으로 쌓은 집은 언젠가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지어주신 집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집을 완성하셨고, 장차 우리가 돌아갈 영원한 천국 집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이번 한 주간, 내가 쌓으려던 나무 블록을 잠시 내려놓으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미 지어놓으신 은혜의 집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비 새는 천장 아래서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맨션, 하나님 아버지의 품이 있습니다.

# [한 주간의 삶을 위한 적용과 실천]

설교의 은혜를 삶으로 이어가기 위해, 이번 주간 세 가지 구체적인 실천을 제안합니다.

1. ‘벽돌 쌓기’를 멈추고 ‘은혜 누리기’

우리는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무언가(봉사, 헌금, 성취)를 쌓으려 합니다. 마치 아이가 나무 블록을 쌓듯 말입니다. 이번 한 주간은 “하나님, 제가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보다, “하나님, 저를 자녀 삼아주시고 모든 것을 은혜로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하루에 한 번, 나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멈춤의 시간’을 갖길 바랍니다.

2. ‘앉아 있는 신앙’에서 ‘찾아가는 섬김’으로 (미트할레크 실천)

하나님은 성전에 가만히 앉아 계시지 않고, 백성의 삶의 현장으로 부지런히 다니셨습니다(할라크). 예수님도 하늘 보좌를 버리고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번 주, 교회나 가정, 직장에서 대접받으려 했던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대신 내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지체, 소외된 이웃, 마음이 힘든 동료에게 먼저 찾아가서 안부를 묻고 작은 위로를 건네는 ‘찾아가는 섬김’을 실천해 보십시오.

3. ‘비 새는 현실’ 너머의 ‘영원한 집’ 바라보기

혹시 지금 경제적인 문제, 건강의 문제, 관계의 문제로 인생에 ‘비가 새는’ 것 같은 막막함을 느끼십니까? 그럴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목사님의 고시원 간증처럼 “하나님이 나를 더 좋은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눈앞의 현실 너머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천국 집이 있음을 기억하며, 불안 대신 소망을 선택하는 한 주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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