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18 칼럼
구글 나노바나나로 그렸음

제목 : 왕관을 벗고 춤을 추다

1. 들어가는 말: 하기 싫은 일이 복이 될 때

처음 목회에 발을 들였을 때, 저는 막연하게 ‘목사는 설교만 잘하면 되는구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설교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합니다. 하지만 막상 부딪혀 본 목회 현실은 설교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일도 감당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저 역시 개척하기 전, 직접 발로 뛰며 구제 사역도 하고, 영상 편집이나 사진 촬영 같은 다양한 실무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개중에는 흥미로운 일도 있었지만, 솔직히 하기 싫은 일도 있었습니다. ‘내가 굳이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싶은 순간도 있었지요.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때 경험했던 그 모든 일이 지금 저에게 얼마나 큰 자산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기 싫고 피하고 싶었던 그 일들이, 결국 저를 단련시키는 가장 큰 복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오벧에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 오벧에돔: 두려움을 넘어선 섬김

지난주, 다윗이 수레로 여호와의 궤를 옮기다가 웃사가 죽고 말았습니다. 3만 명이 넘는 인파와 수많은 악기로 가득했던 축제 현장은 순식간에 싸늘한 장례식장으로 변했습니다. 모두가 얼어붙었습니다. 다윗조차 두려움에 궤 옮기기를 포기했습니다.

이제 문제는 ‘이 궤를 누가 맡느냐’입니다. 웃사가 죽는 것을 눈앞에서 봤는데, 누가 궤를 자기 집으로 들이고 싶었겠습니까? 아마 모두가 속으로 ‘제발 우리 집만 아니면 돼’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두려운 궤가 오벧에돔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1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모두가 피하고 싶었던 궤를 오벧에돔은 ‘석 달’ 동안 정성껏 모셨습니다. ‘오벧’은 ‘섬기다’라는 뜻입니다. 이름 그대로 그는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역대상 26장을 보면 그 복의 실체가 나옵니다. 그의 자손은 무려 62명이나 되었고, 그들은 모두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큰 용사)”들이었습니다. 남들이 기피하는 일을 묵묵히 감당했을 때, 하나님은 당대뿐만 아니라 자녀손 3대에 이르는 가문의 축복으로 갚아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는 언약궤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오벧에돔의 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단순히 교회 건물에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과 일터,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예배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오벧에돔의 가정에 임했던 그 놀라운 복이 저와 여러분의 가정에도 임할 줄 믿습니다.

3. 다윗의 회복: 실패에서 다시 예배로

다윗은 처절한 실패를 맛봤습니다. 왕으로서 큰 망신을 당했죠. 그때 누군가가 오벧에돔의 집이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줍니다. 만약 다윗이 여전히 낙심에 빠져 있었다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느냐?”며 화를 냈을 겁니다.

하지만 다윗은 무릎을 쳤습니다.
‘역시! 하나님은 무작정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야. 우리에게 복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시지! 내가 방법이 틀렸던 것이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이 틀린 건 아니었어.’

다윗은 실패의 자리에서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12절의 ‘기쁨으로 메고’라는 단어가 다윗의 회복된 마음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삶에도 실패는 찾아옵니다. 내 잘못된 판단으로 일이 꼬이고, 뼈아픈 자책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 절망하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실수하고 넘어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책이 아닙니다. ‘예배의 회복’입니다. 다윗처럼 다시 예배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그때 회복의 은혜가 시작됩니다.

4. 순종의 발걸음과 나팔 소리

저는 매주 목요일마다 두 분의 권사님과 전도를 나갑니다. 요즘 전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효율을 따지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전도지를 들고나가는 모습이 참 미련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다윗의 첫 번째 시도가 그랬습니다. ‘어깨’라는 미련한 방법 대신 ‘수레’라는 효율적인 방법을 택했다가 실패했죠. 이제 두 번째 시도에서 다윗은 효율을 버리고 순종을 택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다시 레위인의 어깨에 궤를 멥니다.

그리고 첫발을 뗍니다. 한 걸음. 모두가 숨죽여 지켜봅니다. 아무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또 한 걸음, 두 걸음… 그렇게 여섯 걸음을 무사히 걸었을 때,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효율이 아니라 순종이구나!’
그 벅찬 감격에 다윗은 행렬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이때 15절을 보면, 온 이스라엘이 환호하는데 사용된 악기는 딱 하나, ‘나팔’입니다. 첫 번째 시도 때의 화려한 악기들은 온데간데없고 나팔 소리만 강조됩니다. 구약에서 나팔은 ‘왕의 행차’를 알릴 때 붑니다.
즉, 지금 다윗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 진짜 왕은 다윗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세상의 눈에는 비효율적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배는 하나님이 나의 왕이심을 확인하고 선포하는 가장 위대한 시간입니다.

5. 왕관을 벗고 춤추는 예배자

나팔 소리와 함께 하나님이 왕이심이 선포되자, 14절에서 다윗은 있는 힘껏 춤을 춥니다. 이때 다윗이 입은 옷은 왕복이 아니라 ‘베 에봇’입니다. 왕의 체면과 권위를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한 마리 어린 양이 된 것입니다.

얼마 전, 퇴근하는 아빠를 보고 “아빠! 아빠!” 하며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아이의 영상을 봤습니다. 주변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아빠만 보고 기뻐하더군요.
우리 예배에도 이런 기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점잖은 의식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터져 나오는 어린아이 같은 기쁨 말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십자가 사랑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춤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백성들에게 떡과 고기를 나누어 주었고, 백성들은 그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배의 은혜는 예배당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떡이 되고 고기가 되어 각 가정으로 흘러갔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여러분이 받은 은혜와 감사를 잘 포장해서 집으로 가져가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그 은혜로 인해 더 풍성해지기를 축복합니다.

6. 미갈: 창문 뒤의 구경꾼

온 나라가 축제인데, 유독 그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의 아내 미갈입니다. 성경은 그녀를 굳이 ‘사울의 딸’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울 가문의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녀는 축제의 현장에 나오지 않고 ‘창문’ 뒤에 숨어 구경만 했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나누러 들어온 다윗에게 이렇게 비아냥거립니다.
*”오늘 이스라엘 왕께서 참 영화로우십니다(비꼬며). 마치 동네 건달처럼 천한 계집종들 앞에서 몸을 드러내다니, 참 볼만합니다!”*

우리는 미갈을 통해 예배자가 경계해야 할 4가지를 배웁니다.
첫째, 예배는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체면)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셋째, 비판이 아니라 감사해야 합니다.
넷째, 은혜를 차단하지 말고 전달해야 합니다.

7. 다윗의 고백: 나는 멜렉이 아니라 나기드입니다

미갈의 독설 앞에 다윗은 자신의 중심을 고백합니다.
“나는 사람 앞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뛴 것이다.”

여기서 다윗은 중요한 신학적 고백을 합니다. 미갈은 다윗을 ‘멜렉(절대 군주)’으로 보았기에 체통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을 ‘나기드(주권자/목자)’라고 칭합니다.
‘나기드’는 진짜 왕에게 임명받은 ‘대리 통치자’, ‘청지기’라는 뜻입니다.
“미갈아, 나는 이 나라의 주인이 아니다. 나는 진짜 왕이신 하나님의 종일 뿐이다. 종이 주인 앞에서 기뻐 뛰노는 것이 무엇이 부끄러우냐!”

그래서 다윗은 22절에서 선포합니다. “나는 이것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상관없다.”
이 다윗의 낮아짐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낮고 천한 곳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다윗처럼 춤출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내 자존심, 내 체면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 내 안에는 오직 왕 되신 예수님만 사십니다. 이 고백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 눈치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춤출 수 있습니다.

8. 결론: 왕관을 벗고 춤추는 예배자

오늘 우리는 예배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예배는 세상에서의 내 지위, 내 자존심, 내 체면이라는 왕관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멜렉(진짜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거룩한 항복’입니다. 내가 주인 되었던 삶을 멈추고,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육체를 찢으시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고 천한 십자가의 자리까지 내려가셨기에, 우리는 오늘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기쁨의 춤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배자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첫째, 오벧에돔처럼 섬기는 삶입니다. 남들이 꺼리는 궂은일, 피하고 싶은 자리를 묵묵히 지킬 때, 하나님은 그 섬김을 통해 우리 가문과 자녀들에게 영적인 복을 내려주십니다.
둘째, 다윗처럼 표현하는 삶입니다.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감격하고, 반응하십시오.
셋째, 은혜를 나누는 삶입니다. 예배당 안에서 받은 떡과 고기를 나만 먹지 않고, 가정으로, 이웃으로, 아직 주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로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미갈의 창문’입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아는 있지만 마음은 창문 뒤에 숨어 판단하고, 비판하고, 구경만 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 제목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그 무거운 세상의 왕관, 체면의 왕관을 벗으십시오.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고백처럼 내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고,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춤추십시오. 이번 한 주간, 미갈의 창문이 아니라 다윗의 거리에서, 구경꾼이 아니라 뜨거운 예배자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 적용
한 주 동안 다음의 세 가지를 적용해보면 좋겠습니다.
첫째, 가정에서, 직장에서 다른 사람과 있을 때 그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둘째,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누구와도 좋습니다. 설교 중에, 말씀 읽다가 깨달은 것을 문자로든 대화로든 나누십시오. 대신 단톡방은 아닙니다.
셋째, 비판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그 비판을 내려놓고 칭찬과 격려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한 주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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