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1 칼럼
사진: Unsplash의Christopher Stites

제목 : 용서, 나를 가둔 감옥 문을 여는 열쇠

 1. 용서받지 못한 자의 비극, 그리고 우리의 현실

서부 영화의 걸작 중 하나인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는 과거의 잔인한 살인자였던 주인공이 아내를 잃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다, 결국 돈 때문에 다시 살인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비극을 그립니다. 영화의 마지막, 그는 다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마을을 떠납니다. 제목 그대로 그는 용서받지 못한 자의 길을 택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논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용서보다는 복수와 인과응보가 더 정의롭다고 말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용서는 나약함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용서하셨으며,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 스스로가 ‘용서받지 못한 자’가 되어 영적인 감옥에 갇히게 된다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우리에게 그토록 어려운 ‘용서’를 명령하시는 걸까요? 우리는 누구를, 어디까지, 어떻게 용서해야 할까요?

 2. 공동체를 살리는 용서의 단계와 회복의 원리

성경은 용서를 단순한 감정적 정화로 보지 않고, 공동체를 회복하는 구체적인 과정으로 제시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5절 이하에는 용서의 단계가 명확히 나타납니다. 보통 세상에서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성경은 피해자가 먼저 손을 내미는 ‘찾아가는 사랑’을 요구합니다.

* 첫 번째 단계: 단둘이 만나 권면하라. 이는 가해자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죄로 인해 하나님과 공동체로부터 멀어지는 형제를 다시 얻기(회복) 위함입니다.

* 두 번째 단계: 한두 사람을 증인으로 동반하라. 개인의 권면이 통하지 않을 때, 공동체의 공적인 권위를 더해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 세 번째 단계: 교회의 권위에 맡기라.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그를 이방인과 같이 여겨야 합니다. 이는 교회가 임의로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공동체의 거룩함을 지키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가해자에게 적어도 세 번 이상의 기회를 준다’는 점입니다. 용서의 목적은 죄의 노출이 아니라 죄인의 바로잡음(회복)에 있습니다. 교회는 죄인이 은혜를 입어 모인 거룩한 공동체이기에, 죄 문제는 엄격히 다루되 그 끝은 언제나 살리는 방향으로 향해야 합니다.

 3. 일만 달란트의 은혜: 용서의 근거

베드로는 예수님께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이 세 번까지의 용서를 가르쳤던 것에 비하면 일곱 번은 매우 관대한 제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파격적이었습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 이는 단순히 490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무제한적 용서를 뜻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일만 달란트는 당시 노동자가 20만 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상상조차 불가능한 액수입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께 지은 죄의 무게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상징합니다. 왕(하나님)은 이 절망적인 채무자를 불쌍히 여겨 그 엄청난 빚을 한순간에 탕감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탕감받고 나간 종은 자신에게 고작 100데나리온(약 100일 치 임금)을 빚진 동료를 만나자마자 그의 덜미를 잡고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100데나리온은 미미한 금액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받은 거대한 은혜를 망각했습니다. 결국 이 소식을 들은 왕은 그를 ‘악한 종’이라 부르며 다시 감옥에 가둡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핵심은 용서의 순서입니다. 우리는 용서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구원의 은혜를 이미 받았기에 마땅히 용서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상대방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무한한 용서를 받은 자라는 사실이 용서의 유일한 근거가 됩니다.

 4. 긍휼: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의 공감

성경에서 왕이 종을 불쌍히 여겨 빚을 탕감해 줄 때 사용된 ‘긍휼’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인들에게 ‘내장’이나 ‘창자’를 의미합니다. 즉, 긍휼이란 단순히 불쌍하다는 느낌을 넘어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이 방황하는 무리를 보실 때, 그리고 병든 자들을 보실 때 이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 고통의 절정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기꺼이 감내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은 내 의지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먼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이 처절한 긍휼을 경험하고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향해 그 긍휼의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됩니다.

 5.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다

홀로코스트의 지옥에서 살아남은 이들 중에는 가해자를 포옹하며 용서한 이도 있고, 끝내 용서하지 못한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생존자의 고백은 울림이 큽니다. “용서하고 싶다. 그래야 내가 살더라.”

예수님은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그와 같이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35). 이는 구원의 취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지 않는 자가 겪게 될 ‘영적 감옥’을 뜻합니다. 누군가를 증오하고 복수심을 품고 있을 때, 우리 영혼은 자유를 잃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예배의 감격이 사라지며, 기도의 문이 막힙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사탄이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개인의 영혼을 무너뜨리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결국 용서는 상대방을 면죄해 주는 행위를 넘어, 나 자신을 미움의 사슬에서 풀어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나를 위한 유익’인 것입니다.

 6. 누구를, 어디까지 용서해야 하는가?

첫째,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의 기준은 ‘그가 용서받을 만한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 용서받았는가’입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의 잘못보다 더 큰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들이기에, 용서의 대상에서 제외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둘째,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용서해야 합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죄인이 은혜를 입어 모인 곳입니다. 그렇기에 용서 없이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진리를 포기하는 방종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형제를 살리는 용서가 공동체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많은 성도가 타인은 용서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과거와 허물은 용서하지 못하고 자책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미 용서하신 나를 내가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판결보다 내 양심의 판단을 높이 두는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하나님의 선언을 내 감정보다 더 신뢰하는 것, 그것이 자신을 향한 복음적 용서의 시작입니다.

넷째, 가족을 용서해야 합니다.

가족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차적 책임의 공동체입니다. 가장 가깝기에 가장 큰 상처를 주고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가족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은혜받은 자임을 자각하고, 교회 공동체의 용서 원리를 가정에 가장 먼저 적용해야 합니다.

 7. 용서의 속도가 아닌 방향

우리는 흔히 용서하면 즉시 관계가 회복되고 모든 감정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용서와 관계 회복은 별개의 과정일 수 있습니다. 용서는 단번에 결정하는 의지적 결단이지만, 관계의 회복과 신뢰의 재구축은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용서의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며 씨름하며, 보복의 권리를 하나님께 맡기기로 결정하고 그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잘못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권한을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양도하는 것입니다.

 8.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모임의 성립 요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해야 할 상황, 그 갈등과 고통의 현장에 주님이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해 괴로워할 때, 주님은 우리를 다그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용서 때문에 창자가 뒤틀리는 우리의 고통을 곁에서 똑같이 느끼시며 함께 아파하시는 분입니다. “나도 네 곁에서 그 고통을 느낀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용서할 힘을 얻게 됩니다.

 9. 결론: 선물로 받은 용서, 은혜로 흐르는 용서

용서는 우리가 짜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선물에 대한 반응입니다. 우리는 이미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자들입니다. 미움과 증오의 감옥에 갇혀 자유를 잃어버린 채 살지 마십시오. 주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창자가 끊어지는 긍휼의 마음으로 우리가 그 감옥 문을 열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나를 향한 하나님의 거대한 용서를 먼저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나를 정죄하던 권리를 주님께 맡기십시오. 완벽한 회복은 시간이 걸릴지라도, 오늘 우리가 용서의 방향으로 한 걸음을 내딛을 때 주님은 우리 삶에 진정한 평강과 자유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함께 실천할 적용 질문]

1. 내가 하나님께 탕감받은 ‘일만 달란트’의 은혜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2. 내가 현재 영적인 감옥에 갇혀 있게 만드는 ‘100데나리온’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3. 보복의 권리를 하나님께 맡기고, 용서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행동은 무엇입니까?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선물이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고자 하는 ‘자유’라는 선물의 열쇠입니다. 그 열쇠로 오늘 마음의 감옥 문을 여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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