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스라엘의 잊지 못할 추위와 따뜻한 커피 한 잔
성경의 땅, 이스라엘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기억입니다. 당시 함께했던 목사님들과 우리는 “최대한 경비를 아끼며 다니자”는 암묵적인 합의를 했습니다. 여행 경비를 줄이기 위해 가장 먼저 희생된 것은 식비였습니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든든히 먹거나 직접 만들어 먹고, 점심은 아침에 남은 음식으로 도시락을 싸서 해결했습니다. 저녁 역시 숙소에서 조리해 먹는 식이었지요. 물론 여행의 기분을 내기 위해 가끔은 외식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긴축 재정’의 여정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우리는 산 위에 위치한 기념 교회를 방문하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주변 지역을 둘러보고 차를 타고 산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점심때가 되었고 배가 고파왔기에, 우리는 기념 교회 입구에 마련된 돌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날따라 날씨는 으슬으슬 추웠습니다. 뼈가 시릴 정도의 강추위는 아니었지만, 습기를 머금은 안개와 함께 몸이 은근히 떨려오는 그런 날씨였습니다.
자욱한 안개가 낀 산 위, 차가운 돌 의자에 앉아 식어버린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몸은 덜덜 떨려왔고,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기념 교회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입구 쪽에 작은 기념품 숍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혹시 몸을 녹일 따뜻한 것이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제 눈을 사로잡은 것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커피였습니다. 평소 커피를 즐기지 않던 저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커피가 구원처럼 느껴졌습니다.
일행들과 함께 커피를 주문해 한 모금 마셨습니다. 따뜻한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가 온몸으로 퍼지자, 얼어붙었던 몸이 사르르 녹아내렸습니다. 몸이 따뜻해지니 마음도 푸근해졌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순간 자욱하던 안개가 걷히며 기념 교회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맑은 정신으로 그곳을 온전히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성경에서 ‘변화산’이라 불리는 다볼산(Mount Tabor)으로 추정되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그 거룩한 변화산에서 평생 잊지 못할 커피 한 잔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 속 변화산 사건을 묵상하며 여러분에게도 그날의 커피처럼 영혼을 따뜻하게 데워줄 은혜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2. 산 위에서 마주한 영광: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
마태복음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사역에서 중요한 전환점들은 항상 ‘산’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5장의 팔복과 6장의 주기도문이 선포된 곳도 산이었고, 오병이어의 기적이 행해진 곳도,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밤새 기도하신 곳도 산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는 본문 역시 산 위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곳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고 기록합니다. 이 신비로운 광경 속에 더 놀라운 일이 이어집니다. 구약의 위대한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당시 사진이나 영상이 없던 시절, 제자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세와 엘리야를 어떻게 단번에 알아봤을까요? 물론 성령의 감동으로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왜 하필 모세와 엘리야인가?” 하는 신학적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켜 ‘율법과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즉,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곁에 섰다는 것은 단순히 구약의 위인들이 카메오로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율법과 선지자로 대표되는 구약의 모든 약속과 예언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고 완성되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제자들은 단순히 신비한 유령을 본 것이 아니라, 역사의 정점을 목격한 것입니다.
3. “여기가 좋사오니”: 영광에 머물고 싶은 인간의 본성
이 황홀한 광경 앞에서 베드로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우리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을 대변합니다. 우리는 좋은 곳,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은혜로운 자리에 머물고 싶어 합니다. 옛 유행가 가사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영원히 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눈앞에 펼쳐진 천국의 모형을 보고, 산 아래의 복잡한 현실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맥락이 있습니다. 본문 1절은 “엿새 후에”라는 시간적 배경을 언급합니다. 이는 엿새 전에 있었던 사건과 연결됩니다. 바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며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그 ‘십자가의 길’이 두렵고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산 위에서 예수님의 찬란한 영광을 보니, “그래, 굳이 고난받으러 내려갈 필요가 있나? 여기서 이 영광을 누리며 사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유혹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변화산의 영광은 현실 도피를 위한 안식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장차 닥쳐올 십자가의 처절한 고난과 죽음을 이겨낼 수 있도록, 제자들에게 미리 보여주신 ‘승리의 보증수표’이자 ‘영적 예방주사’였습니다.
4. 압도적인 두려움과 “오직 예수”
베드로가 횡설수설하고 있을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음성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성경은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다’는 헬라어 원어적으로 ‘도망치다’라는 뉘앙스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히’라는 단어는 ‘극도로’, ‘맹렬하게’라는 뜻입니다. 즉, 제자들은 단순히 깜짝 놀란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창조주의 임재 앞에서 죄인인 인간이 느끼는 본능적이고 압도적인 공포, 존재가 부서질 것 같은 전율을 느낀 것입니다.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산 자가 없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땅에 얼굴을 파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그들에게 손을 댑니다. 예수님입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 따뜻한 음성에 제자들이 조심스레 눈을 들어보았을 때, 눈앞의 광경은 바뀌어 있었습니다. 모세도 사라졌습니다. 엘리야도 사라졌습니다. 화려한 빛과 구름도 걷혔습니다. 성경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율법의 정죄(모세)에 시달리기도 하고, 신비한 능력(엘리야)을 갈구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황홀한 은혜의 체험에 도취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지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하실 ‘오직 예수’만 남아야 합니다. 체험은 지나가지만, 말씀이신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 곁에 남기 때문입니다.
5. 일상으로 스며드는 하나님의 임재
많은 성도님이 ‘하나님의 임재’를 어떤 짜릿한 감정이나 기적적인 사건으로만 제한하곤 합니다. 예배 중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거나, 불가능해 보이던 문제가 기적처럼 해결될 때만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그것도 귀한 은혜입니다. 지난 추수감사주일에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일처럼, 부족한 구제 예산을 정확히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때 우리는 전율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그런 특별한 순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바닥을 치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아무리 기도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설명할 수 없는 평안이 내 마음을 지키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변화산의 체험은 우리에게 “산 위에서만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산 아래, 즉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고통이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갈 힘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통장이 비어 있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관계가 깨져 아파도 말씀을 붙들고 견디는 인내, 이 모든 치열한 삶의 현장이 곧 변화산의 은혜가 흘러가야 할 곳입니다.
6. 침묵의 이유: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뜻밖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제자들은 입이 근질근질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산에서 무엇을 봤는지 알아? 전설 속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께 경배하더라! 예수님 몸에서 빛이 나더라!”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침묵을 명하셨을까요?
그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지금 이 사실을 알린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로만 추대하려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광은 원하지만 고난은 싫어합니다. 승리는 원하지만 십자가는 거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받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가짜입니다. 죽음 없는 부활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어야 하기에, 그 구속의 드라마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이 영광스러운 비밀을 간직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고난을 생략한 채 축복만을 바라는 신앙, 십자가를 지지 않고 면류관만을 쓰려는 태도는 참된 기독교 신앙이 아님을 예수님은 침묵 명령을 통해 가르치고 계십니다.
7. 다시 말씀으로, 산 아래의 현실로
산에서 내려온 제자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며 묻습니다. “서기관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하던데요?”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엘리야가 이미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엘리야는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다 권력자들의 미움을 사 비참하게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충격적인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방금 전 변화산에서 온 우주의 주인공처럼 빛나시던 예수님이, 이제 산 아래로 내려와 세례 요한처럼 비참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실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해야 할 ‘산 아래의 현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변화산 사건은 우리 신앙의 두 가지 측면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우리가 언젠가 도달하게 될 ‘영광스러운 천국’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그 영광을 소망하며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살아야 할 ‘처절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며 때때로 산 위에서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 잔과 같은 위로를 경험합니다. 그 황홀한 은혜의 순간에 영원히 머물고 싶기도 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라며 현실을 잊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데리고 반드시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십니다. 그곳에는 여전히 귀신 들려 고통받는 아이가 있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쩔쩔매는 이웃이 있고,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산의 영광은 도피처가 아닙니다. 그것은 산 아래의 고단한 현실을 버텨내게 하는 ‘영적 충전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의 길을 앞둔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리 결말을 보여주셨습니다. “너희가 겪을 고난이 끝이 아니다. 십자가 너머에 이 찬란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믿음으로 현실을 살아내라.”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돌아보십시오. 혹시 지금 춥고 안개가 자욱한 산 중턱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과거에 하나님이 베풀어주셨던 은혜, 그 ‘변화산의 따뜻한 기억’을 꺼내어 보십시오. 그리고 눈을 들어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십시오. 모세도 사라지고 엘리야도 사라진 자리에 남으신 예수님, 그분이 지금 여러분의 현실 한가운데 함께하고 계십니다.
산 위에서 보여주신 그 영광의 빛을 가슴에 품고, 산 아래의 평범하고 때로는 고단한 일상을 묵묵히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믿음의 발걸음 속에 진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